분류 전체보기 4746

불안한 가을 - 강시현

불안한 가을 - 강시현 한자락 바람이 이마에 불꽃을 이고 달려들었다 난산의 흔적 같은 허름한 머리칼을 이고 빈약한 지상의 웃음은 하늘로 날고, 하늘은 한 오백년 삭힌 심사(心事)들의 고열로 앓는 거처를 떠났다 하늘의 높이는 구름만 알아 우듬지 흔드는 불쾌는 언제나 낯선 바람 검은 새는 허공의 불안한 높이를 흔들었다 젊은 가수는 푸르게 나뭇가지에 걸려서 죽고 정지된 표정으로 곡절(曲折)만 앙상히 남아 이국(異國)의 지평선은 쓸쓸해서 둥글고 가을의 토실한 눈알도 가진 것 상관없이 그저 둥글고 굴리고 굴려도 순환의 그 궤도 안, 확인되지 않은 약속만 탈색된 낙엽 속에 갇혀 아무데나 휙휙 흩날렸다 오색바람은 가을을 거둬가려는지 흰 밤부터 검은 낮까지 뒤섞여 놀았다 멜랑콜리를 낳은 국경의 노을 붉은 테라스엔 무산..

한줄 詩 2018.11.01

마른 국화 몇 잎 - 황동규

마른 국화 몇 잎 - 황동규 다 가버리고, 남았구나 손바닥에 오른 마른 국화 몇 잎. 짧은 가을이 갔다. 떨어진 나뭇잎들 땅에 몸 문지르다 가고 흰머리 날리며 언덕까지 따라오던 억새들도 갔다. 그대도 가고 그대 있던 자리에 곧 지워질 가벼운 나비 날갯짓처럼 마른 국화꽃 내음이 남았다. 우리 체온이 어디론가 가지 못하고 끝물 안개처럼 떠도는 골목길에 또 잘못 들어섰다든가 술집 주모 목소리가 정말 편안해 저녁 비 흩뿌리는 도시의 얼굴 그래도 참을 만하다든가 그대에게 무언가 새로 알릴 거리 생기면 나비 날갯짓 같은 이 내음을 통해 하겠네. 나비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가서 폭풍을 낳는다고도 하지만 가을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지는 마시게. *시집, 사는 기쁨, 문학과지성 이 저녁에 - 황동규 마을버스에 실려 ..

한줄 詩 2018.11.01

내가 나의 길인 것을 - 김일태

내가 나의 길인 것을 - 김일태 지독하게 사랑을 해 본 이들은 안다 그리운 것들끼리는 언젠가 만난다는 걸 왜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더디게 돌아가는 길도 지겹지 않다는 걸 길은 흐름이다 흐르면서 길을 낸다 모든 일이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듯이 새 길은 험하고 외롭지만 길을 찾다가 고이면서 다시 풀려 흐르면서 스스로 깊어지고 넓어져 가면서 흐름은 소리 없이도 뜻이 되는 곳에 닿기 위한 몸짓이라는 걸 안다 늘 마지막이고 처음이다 지금은 두려워 말자 밤은 단지 어제와 오늘을 잇는 길일 뿐이다 *시집, 바코드속 종이달, 시학사 가을, 짧은 - 김일태 어줍잖은 만남일지라도 목 메고 몸 지는 일일지라도 좀 그립다가 왔으면 좋았을걸 마음끈을 채기도 전에 주인공이 떠나고 그늘 없는 뙤약볕 아래 바람을 기다리다 ..

한줄 詩 2018.11.01

차가운 밤의 증식 - 한명희

차가운 밤의 증식 - 한명희 세상은 왜 저 은행나무처럼 노랗게 떨어지는 잎들이 싱싱하게 붙어 있는 열매들을 살찌게 하는 구조로 만들어졌을까 머리를 콕콕 찌르며 나를 바닥으로 패대기치는 이 고뿔은 또 어느 구름 속을 떠돌다 내게로 떨어진 가을일까 천고마비는 내 삶이 살찌는 게 아니고 높고 푸른 하늘은 내가 가야 할 종점인데 바람 같지 않은 바람에도 너무 쉽게 흔들리는 사시나무 빈 몸이다 해종일 걷다 생각하니 어둠 속에서 아직까지 흔들리고만 있는 나도 빈 몸, 대나무처럼 안에 든 것도 없이 마디마디 담을 쌓고 위만 보고 살아온 고향집 뒷산에 올라 별이라도 헤어볼까, 하늘 쳐다보는데 아- 달 같은 비로소 달 같은 둥근달이 실핏줄까지 모두 드러낸 채 환하게 웃고 있다 사람 같지도 않은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시..

한줄 詩 2018.10.31

바닥의 권력 - 이은심 시집

가능하면 유명 출판사가 아닌 곳에서 발행하는 시집을 찾아 읽으려 한다. 시중 서점에서든 인터넷 서점이든 독자에게 알려지는 것부터가 중소 출판사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아예 서점에 깔리지도 못하고 구석에 자리했다 사라지는 책이 부지기수일 거다. 밥 먹는 일 빼고 매일 시집을 읽더라도 세상의 모든 시집을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래도 열심히 시를 찾아 읽다보면 좋은 시집도 만나고 가슴 설레는 시 속에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시집이 그렇다. 숨어 있기 아까운 보석 같은 시집이다. 이은심 시인은 그리 알려진 시인은 아니지만 내가 마음 속에 담고 있는 시인이다. 우연히 뒤늦게 발견한 그의 첫 시집을 읽고 열렬한 독자가 되었다. 나를 설레게 했던 시인이었는데 한동안 시집을 내지 않아 잊고 지냈다. 이 시집도 우연..

네줄 冊 2018.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