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영정사진 찍는 노인들 - 김명기

마루안 2018. 11. 3. 21:28



영정사진 찍는 노인들 - 김명기



걷어낸 가을 들판 같은 이들이
산동네 동사무소 담벼락으로 모여 든다
섬벅 나락을 베어낸 자리
까칠하게 남겨진 밑단 같은 수염 위로
깊숙이 발목을 묻고
흠뻑 젖은 채 경작되었을 저마다의 생이
긋고 간 굵고 깊은 고랑들
그 속에서 단단히 여물어갔을 푸르른 날은
어디로 다 떠나고 저 메마른 경작지들은
얼마나 오래 묵어버린 것일까
고랑 하나 질 때마다 찬란이란 빗금이
조금씩 지워져가듯 지상의 삶이란
뜨거웠던 흔적을 남기며
점점 짧아지는 가을 볕 같은 일
볕 좋은 늦가을
생의 방점을 찍는 스산한 들판 사이
어느 갈피쯤에 접혀 있는
설익은 내 삶을 설핏 끼워보다가
한때 저 노구들이 야생(野生)이었던 시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시집, 종점식당, 애지








별리 - 김명기



은행잎 노란 물 든다
청춘, 어느 날 우리처럼 한 사랑이
또 다른 사랑에게 고하는 이별 같은 소식
애태우며 바래다
작은 바람이라도 일면 와르르 몰락하겠다
몰락은 흩어지며 사라지는 일
마지막 순간까지
떨켜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 쓰지만
이별의 그늘은 줄다리기 승자처럼
힘의 반대편으로 점점 길어져
더 이상 감싸 안을 긴밀함이 남지 않을 터
한때 사랑하던 사이
잎 피고 꽃 지던 나무
오천 년만 지나면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들
더 이상 시절이란 세상에 없는 시간
무너지는 시간의 기억 같은 빈가지 곁을
무심히 지나는 당신들과
몰락의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자동차들까지
모든 것들은 쓸쓸히 사라지고
사라짐을 위해 많은 시절이 또 오겠지만
그래도 우리를 기억해 줄 것 같은 이 순간
텅 빈 손바닥처럼 배웅하듯 흔들리는 나뭇잎 새로
막 당도하는 가느다란 몇 줄기 빛에게
나의 안부를 다시 묻는다





#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 시다. 씹을수록 단물이 나오는 시라 해도 되겠다. 연 구분 없이 일정한 호흡으로 읽어 내려오다 <오천 년만 지나면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들>이란 구절에서 그만 가슴이 턱 막힌다. 사정할 때의 오르가즘에 도달한 것처럼 간만에 목덜미 서늘하게 하는 시 하나 제대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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