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 이영광

마루안 2018. 11. 3. 21:50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 이영광



자고 난 뒤 돌아앉아 옷 입던 사람의 뒷모습처럼
연애도 결국은,
지워지지 않는 전과로 남는다
가망 없는 뉘우침을 선사하기 위해
사랑은 내게 왔다가, 이렇게
가지 않는 거다
증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교정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동안
이곳이 바로 감옥이구나, 느끼게 만드는 거다
사람을 스쳤던 자리마다
눈 감고 되돌아가 한 번씩 갇히는 시간
언제나 11월이 가장 춥다
모든 외도를 지우고
단 한 사람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버거운 사람에게
이 추위는 혼자서 마쳐야 하는 형기?
출감확인서 같은 졸업증명서를 기다리며
외따로 선 나무 아래 외따로 앉아 있는
추운 날
붉고 뜨거운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혼자 불타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타오르는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이 있고
떨어져서도 여전히 화끈거리는 단풍잎과
멍하니, 갇힌 사람이 있고
인간의 습성을 비웃으며 서서히 아웃되는 새떼들이 있다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창작과비평








벚꽃 무한(無限) - 이영광



벚꽃 그늘에 서면, 신 벗고 건너야 할 것 같아
그늘그늘한 그늘,
이 세상은 원래 어두운 곳이었네
어두워지는 마음, 안에 엎드려
오래 제 고통의 비린내에 황홀한 뒤면
아니야, 이 세상은 이렇게 밝은 곳이었네
벚꽃 그늘이 작년의 절정을 캄캄히 찾아
다시 세상의 때를 밀어놓았네
저 희디흰 멍자국들,
이 세상에 아름다움 바치러 무릅써 나오는 것들 앞에
읍하고 싶다, 그러나
아름다움보다 무시무시한 고독이 다시 있으랴
다 알아버려서 더이상 안고 싶지 않은
사랑을 외면하듯
벚꽃잎들, 벌써 벚꽃잎들을 어딘가에 버리고 있네
미풍도 그들을 상하게 하네
그러니 유고(有故)한 세월 지나는 이여
온몸 버팅겨 간신히 홈리스를 면한 자여
느닷없이 잠실 야구장을 탈출해오는 파울 볼처럼
그대 인생 한번쯤 빗나갔다 생각, 생각한다면
저 하얗게 끓고 있는 벚꽃 동산의 화독(花毒)에
잠시 취하는 두려움은 어떠신지?
어쩌다 이 세상에 나와 형언할 길 없는
딴 세상을 만나는 복락이, 다시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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