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림 차리고 싶다 - 고성만

마루안 2022. 4. 13. 21:39

 

 

살림 차리고 싶다 - 고성만

 

 

햇살이

뽀얗게 불어터진 젖 물리면

내가 좋아하는 숙자와 이사 가고 싶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동네

작은 방 얻어 들어가고 싶다

 

떠돌이 악사와 그 애인이

밤새 다투는 소리 샤워하는 소리 키들거리는 소리

서울행 열차가 우르르 지나가는 기찻길 옆

퉁퉁 분 오줌보 비우려 밖으로 나서면

반짝이는 잔별들

 

한 시절

곱게 늙어가는 약국

고소한 냄새 풍기는 빵집이 있는 네거리

하루하루 쫓기는 탈주범처럼

중고 제품 판매 구인 구직 급전 대출 아르바이트 모집

생활 광고지 죄다 뒤져

살림 차리고 싶다

 

눈도 코도 오목조목한 숙자와 함께

알록달록 고운 그릇들 장난감 같은 가재도구들

"아이 예뻐!" 호들갑에 맞춰

근사한 미소 흘리며 까짓것 한 번 사는 인생, 큰소리치면서

이불장 빨래걸이

앉은뱅이상

 

창밖으로

뚝뚝 목련 지는데

숙자야, 숙자야,

날 두고 떠나버린 이름 목 놓아 부르며

치명적 독주 한 잔 들이켜고 싶다

 

 

*시집/ 케이블카 타고 달이 지나간다/ 여우난골

 

 

 

 

 


당신 - 고성만


조립식 건물 지붕 아래서 동당동당
빗소리로 오는 당신 목소리
듣습니다

모스부호처럼
자판 두드려 편지를 씁니다

따로국밥이라고 아시죠?
무슨 이런 괴상한 음식이 있나 하고 의아했는데
그릇에 눈을 떨군 채 말없이 숟가락질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광경
가까이 다가가는 것 자체로 죄가 되는 세상

희망의 유통기한은 사라지고
어떻게 손 쓸 수 없이 아프다는 소식 접하며
도와줄 수 없어 가슴만 미어지던 나날들
각자 자신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한없이 슬프게 들리던 당신의 말씀

이젠 알 것 같아요

구름 쪽으로
기울어진 날씨
지금 어디 피어계신지 그 꽃의
주소 좀 가르쳐 주세요, 나의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