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 우대식
참 많은 문신을 보았지만
문신이란
오직 닻 하나
하급선원으로 떠돌았을 사내의 팔뚝에 겨우 매달린
그것,
끝내 정주할 수 없다는 예감으로 문신은 희미해진다
불 꺼진 항구에 수없이 닻을 내렸을 테지만
닳아빠진 그것을 슬그머니 건져 올리는 새벽
남쪽의 별들은 사내의 등을 내려다본다
닻 위에 별을 하나 그려놓아도 좋겠지만
그것은 지고지순이 아니다
저 지고지순은 언제쯤 희미해지는가
다 닳은 지고지순을 안고 한평생을 살아야 하는가
항구에 배를 댈 때
별의 슬픔과 닻의 슬픔이
슬픔을 참아가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지고이네르 지고지순
지고이네르의 지고지순
닻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봄날은 간다 - 우대식
허무의 절창
봄날은 간다
그렇게 사라져야지
꽃잎이 물에 떠서 사라지듯
알뜰한 당신이나 생각하며 삼월의 날들을 살아야지
온통 사랑이라 말하지만
온통 죽음인 한 철을 살아야지
봄날 풀린 물가에서
물오른 강아지풀이나 꺾어 입에 물고
육신이 되고 마음도 되는 가슴이라는 말이나 생각해야지
그러다 낯설고 또 낯설어하며 부끄러워해야지
바람이 불어 그 부끄러움도 다하면
봄날, 살아야지
먼 동방의 나라에서 다시 눈이 쏟아져 내릴 때까지
사랑이라는 그 질긴 인육에 머리를 처박고
당신의 피와 살을 핥아야지
지루하고 먼 나라,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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