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에서의 밤 - 강회진 포구에서의 밤 - 강회진 낯선 포구에서 펴주는 이불은 반달이 걸어준 전언이었다 골목까지 들이치는 파도소리에 납작 귀 기울이는 집들 꿈속에 걸린 허공의 방 몸 절반 절단내고도 천연스레 밤마다 밝히는 선미등 주위로 지친 파도 오글오글 몰려든다 사그라드는 불빛 따라 떠났던 배들 .. 한줄 詩 2019.07.20
당신이 사준 그리움 - 정영 당신이 사준 그리움 - 정영 밤마다 터트리는 폭죽 당신이 사준 것 삶은 한움큼씩 거품을 낳고 아가들은 거품처럼 사라져 파도에게 아프게 사는 법을 배웠네 당신이 사준 불꽃이 침을 탁 뱉고 말하네 사랑은 타고 없어라 나는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백야에 눈만 끔벅이지 퀭한 눈으로.. 한줄 詩 2019.07.19
밑줄을 긋지는 않았지만 - 심재휘 밑줄을 긋지는 않았지만 - 심재휘 장마가 끝난 하늘은 너무 맑아서 구름 한 점인 것이 드러난 구름 감추어둔 말을 들켜버린 저 한 줌의 옅은 구름 전하지 못한 말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너무 멀리 흘러와버렸구나 괄호 속에 혼잣말을 심고 꽃피지 못하는 말들에게 가시 같은 안대를 씌워야.. 한줄 詩 2019.07.19
강변 여인숙 - 서규정 강변 여인숙 - 서규정 그냥 여기서 조금만 머물다 갈까 미루나무 잎이 불러서 왔느냐면 그렇다고 그러지 애늙은이처럼 채 피지도 않아 울 밑으로 비켜선 이 봉선화 꽃집 쥔 여자에게 등 떠밀려 들어선 방 금간 벽엔 어! 못, 옷걸이 못에 목이 박혀서야 둘러보면 온갖 잡념들이 꺼진 TV 씹다만 껌 붙여두었다 다시 떼어 씹는 껌 자리처럼 영 꿈자리가 얼룩덜룩 할 것만 같은 여인숙에 방을 얻어두고 나와 물기 하나 없이 돌아눕는 이 강변을 거닌다는 것이냐 구구절절 옳고 바른 소리로 끓던 강물 곁엔 궁둥이를 남기고 갈 오리는 오리 떼를 따라 어구적어구적 걷는다마는 그렇게 불러 젖혔어도 지금은 잊혀져 생각 안 나는 노래들이 부석부석 뼛가루처럼 스민 모래 위를 목이 막혀서 걷는다마는 노래가 강물이던 시절 나는 어느 구호를.. 한줄 詩 2019.07.19
병으로서의 디아스포라 - 정선 병으로서의 디아스포라 - 정선 개망초 흰 둑길에 서면 그만 아찔, 통곡하고 싶다 바다 건너 침목을 따라온 개망초 뽑아도 베어도 어디든 마음 부려놓을 한 뙈기 땅이 있는 곳이라면 내 살 곳이라고 개망초는 눈부시게 피었다 딸들은 모다 아무 소용없어야 팔순잔치가 끝난 후 아버지는 자.. 한줄 詩 2019.07.18
꽃을 사보자 - 문동만 꽃을 사보자 - 문동만 술값은 아깝지 않은데 꽃 사는 돈은 아까운 체제에, 이 장마에 나는 부역하고 있다 시집은 치워지고 서점은 망해가고 술집은 번성하고 망하기를 반복하고 꽃집은 시드는 이 도시에서 시든 꽃들의 밤에 나는 동조하고 있다 어쩌나, 이렇게 비는 내리고 꽃도 술도 그.. 한줄 詩 2019.07.18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 서광일 시집 더운 날일수록 시집을 더 손에 잡게 된다. 누가 그랬던가. 독서의 계절은 가을이라고,, 책 읽는 계절이 따로 있을 리 없지만 내겐 여름이 책 읽는 계절이다. 꽃 피는 봄과 하늘 높은 가을엔 올해가 마지막일 것처럼 들로 산으로 쏘다니기 바쁘니 더욱 그렇다. 파란 출판사의 시집을 유심히 본다. 정확하게는 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으로 이름이 길다. 신생 출판사인데 몇 개의 시집은 나와 코드가 맞아서 놓치면 아까울 정도다. 요즘 새로 생긴 여러 출판사에서 시집을 많이 낸다. 잘만 고르면 좋은 시집을 만날 수 있다. 드디어 까다로운 내 취향을 비껴가지 못한 시집을 만났다. 라는 독특한 제목을 가진 시집이다. 보라색 표지에 담긴 시들이 하나도 그냥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밀도 있게 마음에 와 닿는다. 흔히 보라색이 귀족(.. 네줄 冊 2019.07.18
병 - 송재학 병 - 송재학 병실 이불 밖으로 슬쩍 드러난 그의 맨발 그게 알약보다 더 희다 먼발치 의자에 앉으면서 적빈을 건드리자 내 몸과 의자의 관절이 동시에 삐걱거린다 눈을 뜬 입 없는 입이 무어라 중얼거린다 흰 벽이 선병질적으로 귀를 쫑긋거린다 맨발을 굳이 감추지만 그제야 얇은 이불이.. 한줄 詩 2019.07.17
멸치 - 성윤석 멸치 - 성윤석 봄꽃 다 떨어지고 오월 나무들은 바다와 같이 푸르름으로 마주 서고 공중화장실 거울을 보며, 야, 이 개새끼야 스스로에게 소리 지를 때 생아, 내 젖통 내 젖통 하며 무거운 멸치젓통을 들고 뛰어다니는 거구의 일일상회 여자처럼 생아, 메가리를 담은 종이 상자를 엇박자로.. 한줄 詩 2019.07.17
아주 특별한 해부학 수업- 허한전 해부학 책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이렇게 흥미로우면서 감동적이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대만 츠지 대학에서 해부학을 가르치고 있는 허한전(何翰蓁) 교수다. 츠지대는 대만 중부지방에 위치한 화련에 있는 대학으로 역사는 길지 않으나 의과대학으로 유명하다. 이 책의 저자와 그가 일하고 있는 대학의 한문 표기를 봤다. 대만의 한자가 중국 본토에서 쓰는 간체가 아니라 우리가 쓰는 한자와 비슷해서 읽기가 수월하다. 츠지대학(慈濟大學)에는 사랑으로 구제한다는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고 불교 냄새가 풍긴다. 츠지대학은 자제회(慈濟會)라는 불교재단이 설립한 학교로 대만 최고의 의과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허한전 교수의 이름도 한문 풀이를 해보면 이름에서 사람의 성품을 읽을 수 있다. 좋은 책을 읽은 뒤가 이렇게 대학에서 저자.. 네줄 冊 2019.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