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밑줄을 긋지는 않았지만 - 심재휘

마루안 2019. 7. 19. 19:27



밑줄을 긋지는 않았지만 - 심재휘



장마가 끝난 하늘은 너무 맑아서
구름 한 점인 것이 드러난 구름
감추어둔 말을 들켜버린 저 한 줌의 옅은 구름


전하지 못한 말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너무 멀리 흘러와버렸구나
괄호 속에 혼잣말을 심고
꽃피지 못하는 말들에게
가시 같은 안대를 씌워야 했구나
차라리 폭풍의 지난밤이 견딜 만했겠다
천둥소리로 가슴을 찢고 자진할 만했겠다


하지만 장마 갠 하늘에
흩어지지 못한 구름 한 점이여
숨을 데 없는 하늘에 들켜버린 마음이여
너무 넓은 고요를 흘러가다가 뒤를 돌아볼까봐
구름에게 나는 몇 마디 중얼거려본다


마지막 사흘을 퍼붓던 비가 그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토록 푸른 하늘이라면
이제는 페이지의 접혀 있던 귀를 펴야 할 때
밑줄을 긋지는 않았지만 그 문장들 아래
없는 밑줄도 이제는 지워야 할 때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다 - 심재휘



집 근처 거리에
감 하나가 제가 만든 그늘 속에 떨어져 있다
한때 단단했던 것도 너무 오래 붉으면 무른다
물러서 터진 것이 질척거리는 보도로 흘러나와
오늘은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는다


이별의 몸이 흥건한 땅바닥에서
그가 둥둥 떠 있던 허공의 어떤 행복으로
괜히 뒷걸음질쳐보고 싶은 저물녘에
나는 와 있는 것이다


뒷걸음으로 가면
주지 말았어야 할 상처들과
들지 말았어야 할 길들을 그냥
지나쳤을 것만 같고
뒷걸음으로 더 멀리 가면
잘 여문 사랑을 다시 찾을 것만 같은데
끝내는 떨어져 온몸으로 가랑비 맞는 감


떨어지고 나서도 마저 익어가는 감 하나가
오늘은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아서
그 붉은 속살 속으로 걸어들어가보는 것인데
뒤뚱거리며 앞으로만 가는 저녁을
이 몸은 벗어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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