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강변 여인숙 - 서규정

마루안 2019. 7. 19. 19:08

 

 

강변 여인숙 - 서규정

 

 

그냥 여기서 조금만 머물다 갈까

미루나무 잎이 불러서 왔느냐면 그렇다고 그러지

애늙은이처럼 채 피지도 않아 울 밑으로 비켜선

이 봉선화 꽃집

쥔 여자에게 등 떠밀려 들어선 방 금간 벽엔

어! 못, 옷걸이 못에 목이 박혀서야 둘러보면

온갖 잡념들이 꺼진 TV

씹다만 껌 붙여두었다 다시 떼어 씹는 껌 자리처럼 영 꿈자리가

얼룩덜룩 할 것만 같은 여인숙에 방을 얻어두고 나와

물기 하나 없이 돌아눕는 이 강변을 거닌다는 것이냐

구구절절 옳고 바른 소리로 끓던 강물 곁엔

궁둥이를 남기고 갈 오리는 오리 떼를 따라

어구적어구적 걷는다마는

그렇게 불러 젖혔어도 지금은 잊혀져 생각 안 나는 노래들이

부석부석 뼛가루처럼 스민 모래 위를

목이 막혀서 걷는다마는

노래가 강물이던 시절 나는 어느 구호를 따라다니다

이 백사장에 울음조차 묻어 두질 못했을까

노래야 나오너라

젊음이나 강물이나 한번 가면 정말로 돌아오지를 않는다

궁둥이를 남겨도 남겨나 두고 갈 삶이 불타던 자리

제목조차 달 수 없는 시편들은 어금니로 씹어 읽어내야 할

모래 같은 문맥들 틈새를 비비적대며

마른 노래로 나는 젖어드는데

강가의 나뭇잎들은 그리운 이름들을 부르고 또 부른다

 

 

*시집, 겨울 수선화, 고요아침

 

 

 

 

 

 

채송화 - 서규정

 

 

얼마나 외로웠으면 꽃밭 구석에서

짹 짹 껌을 씹는 소릴 들어나 보란 듯이

제발 한번만 바라만 보아달란 듯이

놀다 가세요 해바라기님

기어서 누워서 살아가는 목숨이란 듯이,

삼도내 자갈 밑으로 숨어드는 그런 시늉 말고

오체투지의 길이라고 해

세발자전거가 지날 때마다

커억 컥

수도꼭지에 꼭 잠겨 늘어진

고무호스의 헛물을 받아 켤 땐 켜더라도

죽어서도 화병에는 절대로 꽂히지 않을 꽃,

조금만 누워서 지키리

하늘에서 제일로 먼 나라가 바닥이란 걸

그곳에서 지렁이

지렁이와 함께 뒹굴며 살아간다는 그일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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