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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니의 소유권 - 권혁소

금니의 소유권 - 권혁소 남의 살을 조금 더 암팡지게 씹기 위해 금으로 씌워 근근이 버텨오던 어금니를 빼고 티타늄 나사못 두 개를 박았다 두꺼운 거즈를 물려 말 할 수 없게 해놓고 의사와 간호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최소한 한 달은 금연 금주해야 한다고 안다, 혹여 나사못이 턱뼈에 온전히 붙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을 오롯이 환자에게 떠넘기기 위해 단서를 달아두는 것이라는 것쯤 속이 메스껍고 이유 없이 배도 아프다 위암의 전초 증상이 소화불량이라는데.... 별 궁상을 다 떨다가 홈닥터 인터넷에 물어보니 금단 증세란다 통풍을 다스리기 위해 발효 중인 개다래술이라도 한잔 할까 그러기엔 돈 대주는 아내가 너무 무섭다 그나저나 내 돈 주고 씌웠던 금의 소유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노안..

한줄 詩 2020.07.15

바닥이라는 나이 - 박남희

바닥이라는 나이 - 박남희 물속 깊이에서 별을 볼 수 없듯이 내 바닥이 안 보여 내 바닥이 아파 자꾸만 무언가 출렁거려 내 바닥이 불안해 그래서 종종 행복해 쉰이 넘은 나이를 바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닥아, 나를 말할 수 있니 바닥만의 생각으로 바닥만의 몸으로 나를 지탱할 수 있니 내 그림자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향하던 바닥이 태양이라면, 너무 뜨거운 태양이라면 나는 태양에게 말해야겠네 식은 내 사랑도 종종 태워달라고, 내 바닥 위에 네가 서 있네 누군가 너를 꽃이라고 말하네 언젠가 스러질 꽃, 그래서 슬픈 꽃, 그러나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꽃 그래서 내 바닥은 불안해 내 바닥은 아파 내 바닥이 안 보여 세상에 흙이 없는 바닥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내 바닥은 때로 너무 물렁물렁해 *시집/ 아득한 사랑의..

한줄 詩 2020.07.15

죽은 자의 집 청소 - 김완

세상에는 참 많은 직업이 있지만 죽은 자를 위한 직업은 특별하다. 옛날에도 염쟁이라 부르는 장의사와 대신 울어주는 곡비도 있었다. 집에서 죽어야 제대로 장례를 치렀지 밖에서 죽으면 객사라 해서 아예 집안에 들이지 않고 대문 밖에 시신을 안치했다. 지금은 장례 문화가 바뀌어 거꾸로 집안에서 죽음을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요양원이나 병원에서 임종을 하고 그곳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른다. 이 책의 저자 김완은 죽은 자의 흔적을 지우는 사람이다. 일명 특수청소부다. 일본인이 쓴 몇 권의 책에서 유사 내용을 읽었으나 한국인이 쓴 책은 처음이다. 대학에서 시를 전공한 사람답게 문장이 시적이다. 현장을 보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상상이 되는 참혹한 경우가 많다. 죽은 사연도 참으로 다양하다. 병원에서 유언 남..

네줄 冊 2020.07.15

기억의 맹점 - 이주언

기억의 맹점 - 이주언 아버지의 시선이 초점을 잃었다 깊은 구덩이처럼 나를 향하던 눈빛마저 지웠다 아버지 저를 보세요! 나 보여요?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 시선을 안으로 향한다는 것 지난 삶을 들여다보는 일일까 밥상을 엎던 옛날로 되돌아가 젊은 엄마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참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독하게 먹었던 마음이 흔들린다 따뜻한 기억은 지워버리고 어둠만 남긴 나의 반쪽 기억이 아버지 생의 초점을 잃게 만든 것일까 *시집/ 검은 나비를 봉인하다/ 한국문연 능소화 - 이주언 뒤척일 때마다 출렁, 멀미가 난다 병실에는 낡은 배들이 떠 있다 담장의 안쪽에서 날아든 나비를 품었던 아버지 가슴 바깥으로 고함소리 만개하던 날 아들은 훌쩍 담을 넘어 좁은 골목을 지나 먼 바다를 향해 흘러갔다 푸른..

한줄 詩 2020.07.09

무심함에 대하여 - 이서화

무심함에 대하여 - 이서화 원주 중앙시장 골목, 전을 부치는 솥뚜껑은 어쩌면 저렇게 무심한가 메밀전 배추전 미나리전 감자전 서로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지만 그 묽은 반죽 속에 고작 배춧잎이나 파 몇 대궁이 그 얇은 한 장의 힘인 것을 한참을 서서 지켜보았다 고도의 기술이란 다름 아닌 단순하게 손 놀리는 무심함이라는 것 진동하는 냄새의 끝엔 무심한 손끝이 붙어있다는 것 찢어지지 않게 얇게 부치는 기술에도 한쪽을 익히고 그 익은 쪽의 힘으로 뒤집는 일 모난 곳 없는 동그란 모양 파치도 없이 부쳐내는 여자의 근심 한 장이거나 산전수전 끝의 달관이다 전 부치는 냄새는 문득, 이라는 말 오래된 식욕을 불러오는 냄새 근처엔 비 내리는 날의 처마 밑 기름 끓는 소댕이*가 있다 들러붙은 힘으로 익거나, 또 잘 뒤집히는 ..

한줄 詩 2020.07.09

식탁에 수저를 올리는 일 - 박일환

식탁에 수저를 올리는 일 - 박일환 어둠이 안개처럼 부드럽게 밀려오는 저녁 무렵이어야겠다 식탁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올려놓는 일로 세상의 소란함을 잠시 덮는 동안 힘겨웠던 하루가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식탁은 풍성하지 않아도 불평을 모르는 숟가락과 젓가락은 오랜 습관처럼 나란히 자신의 옆을 내어줄 뿐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가난한 자의 몫이었으니 오늘 누가 목구멍 깊이 울음을 삼켰는지 묻지 말기로 하자 다만 식탁에 수저를 올려놓듯이 경건한 마음만 간직하기로 하자 당신의 부어오른 손등을 가만히 끌어당기는 저녁 무렵은 아무래도 저 가지런한 숟가락과 젓가락 위로 가여운 한숨처럼 스며들어야겠다 *시집/ 등 뒤의 시간/ 반걸음 슬픈 현대사 - 박일환 그녀의 발꿈치에 반했다는 말 거짓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늘씬..

한줄 詩 2020.07.09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 - 오수완

아주 독특한 소설을 읽었다. 문체뿐 아니라 내용 또한 첫 페이지부터 번역된 외국 작가의 소설로 생각할 정도였다. 소설 잘 안 읽는 내가 흥미롭게 읽은 것도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의 관장이자 사서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곳에 가야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가득찬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책들이 기증 받은 책이다. 애석하게도 그 도서관은 곧 문을 닫는다. 관장은 기증자들에게 폐관 소식을 알리며 책을 찾아 가라고 연락을 한다. 폐관식날 대부분의 기증자들이 자신의 책을 찾아 간다. 그러나 이색적인 기증자 은 끝내 연락이 없다. 소설에서는 그를 VK라는 약자로 표기하고 있다. 소설은 VK가 기증한 서른두 권의 책을 하나씩 소개한다. 그 속에 깃든 사연들과 ..

네줄 冊 2020.07.09

불온한 꿈 - 황원교

불온한 꿈 - 황원교 저 붉은 봉숭아 꽃잎 으깨어 열 손가락 물들이듯 내 생애 한 철만이라도 너를 그렇게 물들일 수 있다면 저 붉은 봉숭아 꽃잎 으깨어 열 발가락 물들이듯 내 생애 전부를 너와 그렇게 함께 살 수 있다면 아, 널 생각하면 입안에 절로 침이 고여 방금 잘 여문 사과 한 입 깨문 것 같고 수밀도(水蜜桃) 한 입 덥석 베어 문 것 같기고 하고 샛노란 밀감 한쪽 슬쩍 떼어먹은 것 같은 널 그리워하면서 생겨난 불온한 꿈들이 풍선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는 가을 오후 낮에는 해를, 밤이면 별을 헤는 해바라기처럼 오롯이 너를 위해 피어나는 꽃이라면 *시집/ 꿈꾸는 중심/ 도서출판 시가 가시 돋친 자의 일상 - 황원교 햇살 쏟아지는 아침마다 무수한 금빛 화살에 꽂힌 나는 한 마리의 황금 호저처럼 느릿느릿 ..

한줄 詩 2020.07.08

흐린 날에 갇혀 - 윤의섭

흐린 날에 갇혀 - 윤의섭 기후엔 늘 예민하였다 가령 일기 예보라는 가장 새롭고 비인위적인 뉴스에 끌리는 것인데 간빙기를 사는 운명은 시한부에 익숙하다 화창한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날씨를 상징으로 만든 건 샤머니즘도 신비주의도 아니다 겨울은 고난 봄은 희망 눈보라는 시련 단비는 쾌락 날씨에 인간사를 빗대 놓고 우린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항상 바뀌는 날씨는 사람의 일생과 닮았으므로 다만 언제 끝날지 모르고 끝없을 것만 같은 날들이 이어질 때 길고 긴 슬픔의 장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찰나라도 영원한 듯 저미는 이별의 혹한을 사는 중이거나 메마른 가뭄의 땅을 맨발로 걸어야 하는 절망이 이어질 때 어떤 날씨는 죽어서야 바뀐다 그러니 깨지지 않는 상징은 죽음에 가깝다 며칠을 자고 일어나도 두꺼운 구름에 뒤덮..

한줄 詩 2020.07.08

그 곳 - 김윤배

그 곳 - 김윤배 그 곳은 함께 했던 지상의 모든 지점이었으니 너, 그 많은 지점을 이어간 마음의 색깔을 어느 페이지에 기록하게 될지 너, 속의 내가 머물던 지점은 언제나 저물녁이다 그 곳에 눈 내리고 북풍 사납다 내가 홀로 머물던 유배의 낯선 지명, 그 곳 까마귀떼 날고 지금은 오로지 슬픔 일렁이는 낡은 지명, 너에게는 기억되지 않는 유폐의 장소 그 곳에 달빛으로 써내려간 너의 내간을 묻고 오는 나를 내가 아프게 본다 가슴에 묻어도 될 일이었다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암각의 새 - 김윤배 백련 피었다 내게 돌아올 살은 경계 너머 돌 속에 박혀 백년이다 돌 밖으로 나가 산맥을 넘고 싶었던 검은 새가 풍화에 들어 천년이다 그렇게 사라지는 영혼을 백련의 흰 빛에 묻는다 백련이 수척..

한줄 詩 2020.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