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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하고 말하면 - 황형철

뿌리, 하고 말하면 - 황형철 태풍 언저리에 회화나무 송두리째 몰골 드러냈다 맥아리 없이 한 방에 훅 간 것이다 평소 조경에 식견이 있는 모 씨가 말하기를 겉만 번지르르하지 스스로 뿌리 못 내린 탓이란다 영양제 잔뜩 맞춰 덩치만 키우기에 급급해 태생이 편편약골인 것이다 하물며 풀 한 포기도 뿌리가 굳고 실해야 하는 법이어서 마땅히 땅의 습성 충분히 익히고 땅이 받아들인 밤낮의 시간을 체득해야 하는 것 가장 막막한 곳에서 가장 힘차야 어둠을 열고 더 깊숙이 내려갈 수가 있어 비로소 단단히 흙 붙들 수 있는 것 짱짱하게 줄기 키워 꽃도 피울 수 있는 것 땅에 스민 그림자와 땅이 딛고 있는 허공까지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와 함께 하세월에 풍파도 견디며 내공을 쌓은 후에야 나이테를 두텁게 얻을 수 있는 것..

한줄 詩 2020.07.30

장마 이후 - 김정수

장마 이후 - 김정수 늘 꽃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신호등이 바뀌자 우산 세 개를 든 중년 사내가 뛰어갔다 우산 두 개를 든 여자와 늙은 사내가 애타게 애처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건널목 중간에 다리가 불편한 늙은 여자와 중년 사내가 섬처럼 서있었다 맹렬하게 차량들 쏟아지는 길 위에서 중년 사내가 늙은 여자의 젖은 머리를 연신 매만지고 있었다 내부순환도로에서 떨어진 빗물이 파문에 찰방거렸다 붉은 눈에 걸려든 발이 틈, 사이에서 서성거렸다 꽃은 아무리 많아도 빈 곳을 다 들여다보진 못했다 내가 그토록 사거리 건널목에 붙박인 것도 처음이었다 엄마는 저리, 노인요양병원 침상에서 6년을 멈춰있었다 입관하고 난생처음 만져본 얼굴은 차갑고 차가웠다 하마터면, 오래오래 뭍으로 건너온 늙은 섬을 "엄마" 하고 부를 뻔했다 ..

한줄 詩 2020.07.29

탈상 - 강민영

탈상 - 강민영 마지막에 지우는 건 흔적 아니면 불판에서 오그라드는 돼지 껍질 짝이 없는 저고리에 불을 놓자 진저리치듯 뒤틀며 오그라든다 싸구려 천 냄새가 시큼하다 옷장 틈에서 굴러 나온 돌돌 말린 양말 껍데기 안에 또 하나의 껍데기 우리는 어쩌면 껍데기만 지우는지도 몰라 아직도 양말은 발의 체온을 기억할까 발톱에 걸린 실밥이 풀려나와 있다 돌돌 말린 퀴퀴한 냄새가 달아날까 조심스레 주머니에 담는다 평생 아버지의 얼룩을 지우며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도 모르던 어머니에게는 이제 걸레를 내려놓고 곧게 펼 몸이 없다 한 번씩 떨어지는 기름 덩어리에 불길이 훅, 하고 올라갈 때마다 눈동자가 붉어졌다가 내려가는 식탁 상속(相續)에 침을 삼키는 식욕들이 하나둘, 불판 앞으로 모여든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

한줄 詩 2020.07.29

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 - 박서영

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 - 박서영 담벼락 밑에 웅크리고 앉은 노숙자의 발끝에서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붉은 장미꽃 그늘 아래 발끝을 모으고 앉아 있는 고양이는 공기의 도축을 이미 알아차렸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은 토막 난 장미의 거친 숨결 첫 번째 죽음의 매혹을 기록하는 일이다 육체와 그림자를 분리하기 위하여 바람은 한동안 끙끙거렸다 냄새와 울음이 동시에 바람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 담벼락을 스쳐 지나온 사람 기록들을 정리할 때 그곳에 두고 온 그림자에 대해 생각한다 내 그림자는 아직도 나에게 오고 있는 중이다 노숙자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태어나고 있다 발뒤꿈치엔 둥근 파문이 화석처럼 굳어진 지 오래고 그는 담벼락 밑에 앉아 햇볕을 쬐는 시체 나는 공기의 도축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그 풍경..

한줄 詩 2020.07.28

구름의 방향 - 박수서

구름의 방향 - 박수서 세월과 시절을 잡아둘 수 없지만, 제트기가 지나가고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똥줄처럼 공중에서 산산조각 나버리지만, 흔적은 가슴에 박무처럼 머물고 새총처럼 허공에 포물선을 긋는다 영원히 갈 수 없는 나라를 생각하는 날은 유효기간이 지난 여권을 펼쳐보듯 그리움의 얼룩이 졌고 내내 한 곳만 보고 있자니 눈 밖으로 사라져버렸고 끝내 저 하늘 어디로 갔는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게 하늘의 조화 때문은 아닐 것이니 저 하늘 어디라도 구름은 있을 것인데 그저 허투로 바라보다 놓쳐버렸거나 고개 들어 한번 망연하게라도 올려보지 못함이라 풍향계처럼 수직의 축을 가슴에 꽂고 바람의 방향으로 톱니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하여도 정확히 방향을 읽지 못한다면, 먼저 나를 관측하고 옳게..

한줄 詩 2020.07.28

신발 베고 자는 사람 - 유홍준

신발 베고 자는 사람 - 유홍준 아직 짓고 있는 집이다 신축 공사 현장이다 점심 먹고 돌아 온 인부들 제각각 흩어져 낮잠 잘 준비를 한다 누구는 스티로폼을 깔고 누구는 합판을 깔고 누구는 맨바닥에 누워 짧고 달콤한 잠의 세계로 빠져 들어갈 준비를 한다 신발 포개 베고 자는 사람은 신발 냄새를 맡는다 웃옷 돌돌 말아 베고 자는 사람은 웃옷 냄새를 맡는다 딱딱한 각목 동가리를 베고 자는 사람은 딱딱한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찌그러지든 말든 상관없는 신발 두 짝을 포개 베고 자는 사람은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과 새로 사야 할 것들 이제는 다 옛일이 되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사실은 아무 생각도 안 한다) 아직 문짝이 끼워지지 않은 집은 시원하다 시원하다는 것은 막히지 않았다는 거다 세상 모든 집은 완공되기 전에..

한줄 詩 2020.07.28

각근하다 - 박미경

각근하다 - 박미경 땡볕 아래 치약으로 운동화 씻어 장독대에 붙여 세워놓은 눈부신 흰빛에 반해서 혼자 아들 다섯을 먹여 살리던 옆집 아주머니 그 셋째아들 덥석 큰 짐 끌어안고 말았다는데 흰 운동화 덫에 걸린 여자 구두만 신고 다니는 여자 남편이 외박할 때마다 구두 사쟀다 신발장 채워지면 이혼한다며 그 신 잘 넘기기 위해 꼭대기 스물한 평 아파트 무너져라, 악쓰다가 밥상 차린다 남편이 좋아하는 흰쌀밥 조기 노릇하게 굽고 김 소고기찌개 공손하게 밥상 받은 남편 주저리주저리 그녀 노여움 살피며 털어놓는다는 말이 허파 뒤집는 일 너거엄마는내한테제삿밥먹으러오는거보면체면도없제 홧김에 조기 접시 뺏는 여자 *시집/ 토란꽃이 쏟아졌다/ 詩와에세이 욕쟁이의 호적 - 박미경 노쇠한 흙담이 집을 꼭 끌어안고 있었지 집은 울..

한줄 詩 2020.07.27

토란꽃이 쏟아졌다 - 박미경 시집

아주 묵직한 시집을 읽었다. 우화적이면서 서사성이 강한 시들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OO했어요. OO할 거에요. 그랬습니다 등 경어체로 된 달달한 시와는 다르다. 단 것을 많이 먹으면 헛배만 부르고 목이 마르다. 시도 그렇다. 요즘 시들은 너무 달다. 꿀이라도 들었으면 다소 위안이 되련만 성분을 분석해보면 단 맛을 내는 것들이 죄다 인공감미료다. 달달한 문장, 현란한 수사(修辭), 거창한 문학이론까지 모범적으로 동원했지만 뒷맛이 공허하다. 아니면 내가 그런 시에 공감 못하는 문자부적응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류 시인보다 숨어 있는 비주류 시인에게 더 관심이 있다. 이 시집은 맺힌 것을 드러내지 않고 울음을 참으며 꾸역꾸역 쓴 시라고 할까. 그래서 매끄럽게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읽으면서 금방 맛이 느껴지..

네줄 冊 2020.07.27

날아라, 이스타 항공

제주항공이 결국 이스타항공 인수를 포기했다고 한다. 하긴 완전 자본잠식 상태에다 항공운항증명 정지까지 되었으니 비행기 양쪽 날개를 다 잃은 셈이다. 이런 빚더미 항공사를 덜컥 인수할 기업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이스타항공은 지난 3월 국적항공사 중 처음으로 국내 노선까지 모든 운항을 멈춘 상태였다. 코로나 장기화로 가장 타격을 받은 업종이 항공 업계다. 여행사 또한 완전 밑바닥 경기를 경험하고 있다. 반면 택배사와 마스크 업체는 호황을 누린다. 저가 항공사들이 앞다퉈 운항 노선을 늘리며 훨훨 날았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1년 전이다. 작년 가을까지도 제주 여행을 할 때면 이스타항공을 자주 이용했다. 나름 언제 어떻게 해야 좀 더 저렴한 표를 구하는지 방법을 터득했다. 창가 좌석에 앉게 되면 창 밖 풍경을 ..

다섯 景 2020.07.23

딱딱하고 완고한 뼈 - 김대호

딱딱하고 완고한 뼈 - 김대호 뼈를 만진다 손목뼈를 만지고 광대뼈도 만진다 내 형식을 완성한 뼈의 굴곡이 내 근황이다 손가락 몇 개가 뼈의 굴곡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내 안의 습곡을 찾아다니는 일보다 뼈를 만지는 일이 쉽다 쉬우면서 금방 진단이 나온다 너무 딱딱한 걸 숨기고 있구나 문어같이 기어다니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이 뼈의 완고한 구조가 불만이구나 유치가 찬란한 한낮 새가 날아간 도로 쪽 허공에 손가락을 펴 대보았지만 손가락뼈는 탁본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있는 흰 뼈들의 상세한 근황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 확인했다 동면에 들어간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웃고 발랄하고 찡그리고 헛되었는데 그 일체가 동면 중에 꿈꾸는 사건들이었다 깨어나기에 적당한 기온이 찾아왔을 때 내 뼈의 배열은 ..

한줄 詩 2020.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