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닥이라는 나이 - 박남희

마루안 2020. 7. 15. 21:47

 

 

바닥이라는 나이 - 박남희

 

 

물속 깊이에서 별을 볼 수 없듯이

내 바닥이 안 보여

내 바닥이 아파 자꾸만 무언가 출렁거려

내 바닥이 불안해 그래서 종종 행복해

 

쉰이 넘은 나이를 바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닥아, 나를 말할 수 있니

바닥만의 생각으로 바닥만의 몸으로

나를 지탱할 수 있니

 

내 그림자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향하던 바닥이

태양이라면, 너무 뜨거운 태양이라면

나는 태양에게 말해야겠네

식은 내 사랑도 종종 태워달라고,

 

내 바닥 위에 네가 서 있네

누군가 너를 꽃이라고 말하네

언젠가 스러질 꽃,

그래서 슬픈 꽃,

그러나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꽃

 

그래서 내 바닥은 불안해

내 바닥은 아파

내 바닥이 안 보여

 

세상에 흙이 없는 바닥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내 바닥은 때로 너무 물렁물렁해

 

 

*시집/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걷는사람

 

 

 

 

 

 

갈필(渴筆)을 잡다 - 박남희

 

 

이것은 나의 갈필로

세상의 모든 여백 위에 쓰고 싶은 이야기이다

 

나를 계절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를 버리겠다

나의 바람을 버리고 나의 이파리를 버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던 모든 눈들을 버리겠다

 

나는 때때로 버림받을수록 단단해진다

나를 상처라고 말한다면

그 상처 속에 숨어 있던 것들을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로 풀어놓아

이야기 속의 모든 목소리가 더 이상

상처를 말하지 않을 때까지

나를 버리고 버리고 버리겠다

 

나를 버리고 나면

그 맨 밑바닥에서 말없이 고여오는 것을

더 이상 눈물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살아온 내 삶과 사랑에 대해

내 안을 드나들던 모든 바람과 꽃들에 대해

묵을 버리고 허공을 버리듯

 

더 이상 가엾지 않은 나를

무심코, 우연히 버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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