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억의 맹점 - 이주언

마루안 2020. 7. 9. 23:09

 

 

기억의 맹점 - 이주언


아버지의 시선이 초점을 잃었다
깊은 구덩이처럼 나를 향하던 눈빛마저 지웠다

아버지 저를 보세요!
나 보여요?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
시선을 안으로 향한다는 것
지난 삶을 들여다보는 일일까

밥상을 엎던 옛날로 되돌아가
젊은 엄마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참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독하게 먹었던 마음이 흔들린다

따뜻한 기억은 지워버리고
어둠만 남긴 나의 반쪽 기억이
아버지 생의 초점을 잃게 만든 것일까


*시집/ 검은 나비를 봉인하다/ 한국문연


 

 



능소화 - 이주언


뒤척일 때마다 출렁, 멀미가 난다
병실에는 낡은 배들이 떠 있다

담장의 안쪽에서
날아든 나비를 품었던 아버지
가슴 바깥으로 고함소리 만개하던 날

아들은 훌쩍 담을 넘어
좁은 골목을 지나 먼 바다를 향해 흘러갔다
푸른 바람이 그의 손을 잡았고 어깨를 껴안으며 눈물 닦아주었다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비치지 않던 시절이었다

종일 쏟아진 태양이 수면 위에 붉게 번질 때
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된 아들은,
생의 모든 출렁임을 감당하기로 한다

요양병원 담장 위로 포복을 한 채
침대 난간 붙잡고 마지막 항해를 하는 배들을 훔쳐본다

눈감고 수심을 가늠하는 배
지난 삶을 후회를 하며 흔들리는 배
난간을 넘어 이미 추락했거나 손목이 묶인 배

담장 넘나들었던 아버지의 고함소리들
툭 툭 떨어져 
주홍빛 울음으로 낭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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