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 김윤배 시집

생각하지 않던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김윤배 시인의 다. 김윤배 선생은 1944년 생이니 팔순이 가까운 원로 시인이다. 그동안 10권이 넘는 시집을 꾸준히 냈고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생의 시가 변한 건지 내 눈이 변한 건지 우연히 잡은 시집을 여러 번 읽었다. 많은 시를 읽기보다 좋은 시를 반복해서 읽는 편인데 이 시집이 그랬다. 그동안 선생의 시집을 몇 권 읽었으나 크게 인상이 남지 않았다. 그의 시가 너무 고급스럽거나 나의 시 읽기가 너무 아마추어거나 둘 중 하나다. 내가 보기엔 시인의 시가 변했다. 이전 시집인 에서부터 느꼈다. 창비에서 나온 그 시집을 읽고 그 이전에 나온 시집을 찾아 읽으며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아! 같은 시인인데도 시집에 따라 내 마음에 들어오기도 하고 아무 공감..

네줄 冊 2020.07.08

걷는 사람 - 우남정

걷는 사람 - 우남정 저기, 그 사람이 온다 두 손을 다른 높낮이로 흔들며 초로의 사내는 필사적이다 해를 바라보고 걷다가 사선으로 걷다가 문득, 역광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어망에 갓 잡힌 물고기처럼 걷는다 두 발이 각각의 각도로 걷는다 걸으려는 사람과 버티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 걷는다 허우적거리는 사람과 춤추는 사람이 함께 걷는다 날개를 말리는 새처럼 우두커니 걷는다 낙뢰가 칼날로 내리친 밤 절개지처럼 무너져 내린 길을 그는 얼마나 오래 걸어온 것일까 기척이 없던 벽조목에 까치 한 마리 울다 간다 너의 왼발과 나의 오른발을 묶고 뛰던 유년의 풍경이 스쳐간다 수직으로 솟는 도시가 지나간다 엇박자 나는 무수한 아침이 걸어간다 하낫! 하낫! 그는 넘어질 듯 일어서며 수평을 흔들고 있다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한줄 詩 2020.07.07

민어의 노래 - 김옥종 시집

김옥종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시인이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다. 내가 애독하는 한겨레 신문에 나온 기사를 읽고 목록에 올려 놓은 시인이었다.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서점에서 읽을 만한 신간 시집 없나 돌러보다 이 시집을 발견했다. 맛집이든 책이든 남이 추천하는 것을 무조건 따르지 않기에 시집 선택도 내 스스로 점검하고 결정한다. 어디까지 가 봤니,, 몇 편 읽으면서 단박에 괜찮은 시인임을 인정했다. 사투리를 사용한 싯구로 인해 지역색이 다소 진한 아쉬움에도 좋은 시가 많았다. 시집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세한 시인의 이력은 필수다. 이 시집에 대한 언론 검색을 했더니 몇 개의 기사가 나온다. 출판사에서 미리 작성해서 돌린 문장일까. 보도 매체는 다른데 알림 기사가 천편일률적이..

네줄 冊 2020.07.07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 김영옥 외

내용도 좋고 책 재질도 친환경적으로 소박하고 가격도 비교적 착한 책이다. 특히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독자를 물고기로 보고 제목으로 낚기 위한 함량 미달인 책이 많은 요즘인데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라니,, 언젠가부터 새벽 무렵 잠이 깨는 경우가 잦다. 나는 지독한 잠보였다. 누웠다 하면 업어 가도 모르고 아침 잠이 많아 천둥 소리처럼 요란한 알람 시계를 두 개씩 놓고 잤던 잠퉁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매일 잠자기 전에 알람 시계 하나는 책상 아래 깊은 곳에 감춰야 했다. 가까운 곳에 두면 잠결에 알람을 끄고 도로 자는 것을 방지하는 묘안이었다. 알람이 울리면 끄기 위해 의자를 꺼내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꺼야 겨우 잠을 깼다. 오십대가 되어 변한 게 있다면 노안이 온 것과 이른 아침..

네줄 冊 2020.07.03

다정한 죽음 - 정병근

다정한 죽음 - 정병근 죽은 선배를 문상하고 왔다 그이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생각건대, 먼저 죽은 사람들은 모두 다정하다는 것 면적스럽게 굴지 않고 꾸역꾸역 살지 않았다는 것 살아서 어질던 그들은 맥없이 갔다 나무처럼 덤덤하고 풀꽃처럼 소박한 삶이었다 살면 사는 대로 죽으면 죽은 대로 다정은 가난과 함께했다 모두 자기 것인 양 허기를 꼭 부여안고 쥐 죽은 듯 살다가 병을 얻거나 바퀴에 깔려서 그만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영정 사진의 웃음조차 힘없이 다정하여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시끄러웠다 또 생각건대, 어느 흉악한 시절에 총칼 맞아 죽은 이들도 모두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순한 공포를 눈에 담은 채 그이들의 시간은 멈추었다 삶에 겨워 버둥거리는 내 어깨를 다정하게 도닥여 주었다 *시집/ 눈과 도끼/ 천년..

한줄 詩 2020.07.03

들꽃 - 이우근

들꽃 - 이우근 풀숲이나 기타 경계 모호한 곳에 꽁초처럼 톡, 던져졌지만 한때 뜨거운 꿈도 있었지 절대 바람을 탓하진 않지, 비겁하니까 그러나 땅의 거름도 못 되고 바람의 생체기만 되어 우리, 만만한 얼굴들 하나쯤 제거되어도 표시나지 않지 서로 기대고 뭉개며 존재의 의미를 주무르며 사소한 책임전가로 옹알대는 즐거운 들판 그것이 우리의 생업(生業)이지 어둠이 별의 배후라면 땅은 우리의 막후실력자, 그래, 우리는 부드러운 폭력, 별의 배설물 의미 없는 항거의 나날들, 변두리의 공화국들, 독립이 아니라 폐기되는 소외일지도 몰라, 그래서 찬밥 신세, 하여 꿈의 실크로드를 무단으로 점령하여 자빠지고 넘어지며 무성한 생식으로 대책없이 지평 넓혀가며 일말의 존재감 과시, 나는 없어도 우리라는 평화, 그 무모한 위안,..

한줄 詩 2020.07.03

마네킹의 법칙 - 천융희

마네킹의 법칙 - 천융희 몇 달째 부동자세인 텅 빈 점포 창고 대 방출을 거쳐 막다른 고별세일에 다다르면 결국 옷을 벗을 수밖에 없는 마네킹의 법칙이 있다 최후의 각도로 끝까지 버티고 있는 환한 침묵 차마 접지 못하는 저들의 표정을 보라 머리 팔다리며 허리 결국, 분해되어 뒤엉킨 채 트럭에 실려 나가는 그들의 시간이 도래한다 쇼윈도에 나붙은 임대가 가까스로 성립되면 일손을 갈아 끼우고 또 다른 각도를 꿈꾸는 그들의 세계 사지 멀쩡한 저들끼리 뭉쳐 웅성거리는 아예 길가로 내몰린 마네킹들 사이로 어렴풋이 사라지는 사람들 그인지 저인지 알 길이 없는 *시집/ 스윙바이/ 한국문연 달의 폐곡선 - 천융희 말하자면 밤의 척추처럼 주상복합 아파트를 돌며 점점 커지는 붉은 몸뚱어리 최저시급을 수거하는 그의 직무는 무분..

한줄 詩 2020.07.02

왼손이 집을 나갔다 - 한관식

왼손이 집을 나갔다 - 한관식 호된 질책도 매질도 없었지요 그날은 여느 날처럼 평온했고 반찬투정 없이 밥 한 공기를 가뿐하게 비운 모습에서 별다른 낌새는 느끼지 않았어요 가만, 그러고 보니 약간은 의도하지 않는 곳에서 덤벙대는 모습을 보긴 했지요 가령 악수할 때 나서는 소소한 질투에서부터 팔씨름에서 오른손을 밀치고 앞장서거나 사인을 해야 할 각인된 자리에서 대뜸 볼펜을 집어든 따위 눈짓으로 제지를 물론 했었지요 그런 것으로 상처를 받았다면 나도 수십 번 상처를 받았겠네요 어디에든 대표선수가 있기 마련인데 물주전자선수가 넘볼 자리는 아니잖아요 그래도 막상 소식도 끊기고 내 눈앞에서 얼쩡거리지 않으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보고 싶긴 하네요 해서 신문광고 난에 한 줄 올렸죠 '오른손 장갑 줄여 놓았으니 즉시 돌..

한줄 詩 2020.07.02

치부 - 서광일

치부 - 서광일 너는 줄곧 피 묻은 빤쓰 얘기를 했다 다들 해바라기처럼 빤히 보고만 있었다고 보는 사람과 보여 주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날카롭게 뼈마디를 쑤셔 대는지 내게서 반죽 치대는 소리가 났고 끝까지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들을 따라 떼어 낸 수제비 모양 바닥을 굴렀다 한참 저녁들을 먹을 시간에 그러다 죽을 수도 있었겠지만 죽음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시뻘건 눈물 콧물이 김치 국물처럼 떨어져 결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깨진 반찬통 옆에서 울었고 TV는 깔깔대며 나뒹굴었다 취한 남편이 지쳐 주저앉을 때까지 살이 터져 피가 몽글몽글 솟아도 어디 하나 아픈 줄 몰랐다고 목장교회 삼거리 골목 어귀에서 터진 쓰레기봉투마냥 전봇대에 기대앉아 빤쓰에 묻은 피가 번질까 봐 조각난 옷자락만 여미고 있었..

한줄 詩 2020.07.01

흘러간다 - 김진

흘러간다 - 김진 오늘 만난 택시 기사는 내비게이션을 끄며 눈이 침침하다고 했다 한평생을 길 위에서 살았지만 세 명의 자식은 이국땅에 산다고 백발의 드라이버는 물때가 낀 페트병을 들어 목을 축였다 세월이 닦은 하얀 머리칼이 그의 머리에 가지런히 누워 길을 열고 있었다 저기는 아직 닿지 않은 곳 나는 푸른빛이 도는 마스크를 쓰고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걷고 있을 것이다 저만치 먼저 가는 택시 기사를 알아보면 어여쁜 물통 하나 쥐여주고 그의 벗이 되어 마음보다 먼저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걷고 있을 것이다 간간이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세다 차창 밖을 보니 페트병 뚜껑을 닫은 그가 아직은 때가 아니니 창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 뿌연 거리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주름을 숨기고 황혼에 이르는 ..

한줄 詩 2020.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