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곳 - 김윤배

마루안 2020. 7. 8. 19:05

 

 

그 곳 - 김윤배


그 곳은

함께 했던 지상의 모든 지점이었으니
너,
그 많은 지점을 이어간 마음의 색깔을 어느 페이지에 기록하게 될지

너, 속의 내가 머물던 지점은 언제나 저물녁이다

그 곳에

눈 내리고 북풍 사납다
내가 홀로 머물던 유배의 낯선 지명, 그 곳
까마귀떼 날고
지금은 오로지
슬픔 일렁이는 낡은 지명, 너에게는 기억되지 않는 유폐의 장소

그 곳에
달빛으로 써내려간 너의 내간을 묻고 오는 나를 내가 아프게 본다

가슴에 묻어도 될 일이었다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암각의 새 - 김윤배


백련 피었다

내게 돌아올 살은 경계 너머 돌 속에 박혀 백년이다 돌 밖으로 나가 산맥을 넘고 싶었던 검은 새가 풍화에 들어 천년이다 그렇게 사라지는 영혼을 백련의 흰 빛에 묻는다 백련이 수척해지는 저녁이다

환생을 말하지 않는다면 시작은 너무 늦었다

운명이라고 말하면 운명이 되는 건 아니다

홀로인 새는 처음부터 홀로였다

묘비명은 하얗게 빛나고 슬픔 없이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는 하루의 묵념은 천상에 닿지 않는다 환생이라 했으니 어떤 모습으로든 돌아올 것을 믿는다 암각의 새들을 날게 한다면 풍화 이전의 모습을 놀라지 않아도 된다

암각의 새가 눈동자를 움직이는 날은
다른 별에서 시작된 서사거나 환생 이후의 서약이어서

운명이라 말할 수 없다


 


# 김윤배 시인은 1944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한국방송통신대, 고려대 교육대학원 및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겨울 숲에서>,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굴욕은 아름답다>,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 <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 <부론에서 길을 잃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바람의 등을 보았다>,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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