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 박래군

해마다 5월 말이나 6월 초쯤이면 마석 모란공원을 간다. 큰 의미 부여할 것 없는 추모 겸 소풍이다. 기차로도 가고 버스로도 가고 아름다운 소풍이다. 여름으로 접어든 주변 풍경과 마석이란 지명도 모란공원이란 이름도 그렇게 딱 어울리는지,, 이때쯤이면 모란공원 묘지 주변은 망초꽃을 비롯한 각종 들꽃이 지천이다. 잘 정돈된 국립현충원과 대비된다. 나는 칼처럼 각진 현충원의 경건함보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모란공원이 인간적이어서 정감이 간다. 처음부터 계획적인 묘지 조성이 아닌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이라 더 인간적이다. 줄을 세우지 않아 구불구불 삐뚤삐뚤,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묘지에서 죽은 자의 평등함을 느낀다. 전태일, 문익환, 조영래, 김근태, 노회찬까지 이름만 들어도 두근거리는 분들이 묻혔다. 모란공..

네줄 冊 2020.07.01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 강민영 시집

강민영 시인은 2015년 늦깎이로 등단해서 이번에 첫 시집을 냈다. 군대간 아들을 향한 애틋함을 담은 그의 산문집을 읽으면 그가 중년을 넘은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일찍부터 글을 썼던 문장가임을 느낄 수 있는 중년의 첫 시집이 보석처럼 빛난다. 스마트 시대여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새것이 대접 받는 세상이지만 나는 늦깎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사전적 의미는 나이가 들어서 어떤 것을 시작하거나 뒤늦게 꿈을 이뤄 성공한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늦깎이의 본래 뜻은 을 일컫는 말로 나이가 들어서 머리 깎고 중이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언어란 것이 생명과 같은 것이라 시대의 변화를 따라 이처럼 본래의 뜻이 변하기도 한다. 불교도는 아니지만 지금도 파르스름하게 깎은 스님의 머리를 보면 서늘해진다. 종교인도 ..

네줄 冊 2020.06.30

중심을 잡는 것들 - 강민영

중심을 잡는 것들 - 강민영 창이 비바람을 긁을 때 자칫 쓰러질 뻔했다 젖은 관절에 집중한 힘은 손바닥 끝에 모였다 막대비가 나무를 때릴 때 매 맞는 수천 개 손바닥은 상상한다 여기서 쓰러지면 나이테가 출렁이고 산길이 휘고 물줄기가 길을 바꾼 자리에 벼랑이 나타나고 바닥은 또 천 길 위로 솟구쳐 오르겠지, 꿇지 않은 무릎엔 섣불리 뿌리가 자라나고 굽은 허리가 멍든 이파리를 말린다 너는 내 앞에서 멧집을 키웠고 나는 네 뒤에 숨어 버티기만 했다 가끔은 뿌리가 뽑힐 듯이 흔들려야만 중심을 잡는 것들이 있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모자 - 강민영 차가운 바닥에 앉은 남자가 모자에 더러운 동전 하나 넣고 허공에 피가 도는 걸 경청하고 있다 그는 내 그림자보다 더 짙은 그늘 속에..

한줄 詩 2020.06.30

맛 감별사 - 이철수

맛 감별사 - 이철수 -돈맛 메주 뜨는 냄새가 나네, 어디 상한 꼭지에서 구린내가 난다 뚜껑을 열자 아주 물러진 값이 칠푼이다 오래 묵어서 부패해진 본성인데, 그래도 그렇지, 누가 누룩의 맛이라고 했나 터무니없이 단맛이다 어떤 입은 제 맛을 들키지 않으려고 설익거나 곰삭을 대로 곰삭거나 아예 새까맣게 그슬려서 귀를 닫고 살금살금 어떤 혀로도 읽어낼 수 없도록 불가해한 속내를 숨기기도 하는데 이 은밀한 맛은 그러나, 대단히 직설적이고 절대적이며 독보적이다 이 깊은 맛에 혼을 빼앗기고 몸을 망친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룬, 고래(古來)로 그 집 앞마당에서 죽어나간 이들의 수효는 얼마고,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처럼 그 맛에 들려 천국을 파는 사제(司祭)들이 지금도 넘쳐난다니, 가히 구리고 독(毒)하고 쿰쿰한 그 맛..

한줄 詩 2020.06.30

나의 늙은 애인아 - 이지상

나의 늙은 애인아 - 이지상 나의 늙은 애인이 가릉 가릉 낮은 목소리로 시를 읽어 주는 밤이었다라고 쓸 그런 밤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늙기 시작했고 나의 늙은 애인은 어느 페이지 행간에 틀어박혔는지 그런 밤엔 잠도 오지 않았다 나의 늙은 애인아 어감도 좋은 나의 늙은 애인아 볕 좋은 지붕 위 고양이처럼 순하게 늙어 가자 나의 늙은 애인아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늙은 애인아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처럼 천천히 늙어 가자 생의 구비란 고갯길을 벌써 넘어 왔을 나의 늙은 애인아 여덟 시 삽십오분 발 정선행 기차를 타고 오늘을 떠나자 첩첩산중이면 어떠랴 당신은 나의 능선이 되고 나는 그대의 능선이 되어 설운 삶의 고갯길을 넘어가도 좋겠다 나의 늙은 애인아 어감도 좋은 나의 늙은 애인아 아우라지 장터국밥 한그릇처럼..

두줄 音 2020.06.29

무지개는 왜 북쪽에서만 뜨는 걸까 - 정훈교

무지개는 왜 북쪽에서만 뜨는 걸까 - 정훈교 두 아들의 어미였다가 두 아비의 아내였다가 흔적도 없이 무너진, 그녀에게 밤마다 혓바늘이 돋아납니다 그의 입 속엔 물가자미의 등가시가 자라고 있습니다 월요일엔 붉은 가시가, 목요일엔 다 자란 흰 가시가 손등에 피어납니다 오호츠크해 어디쯤에서 왔다는데 자꾸만 미워집니다 뭍을 떠나왔다는 그의 이야기는 입을 떠나왔다는 그의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에요 촉수에서 돋아난 그녀가 달을 찌르고, 배꼽을 찌릅니다 아프지도 않은데 물가자미의 등가시는 더욱 환합니다 그믐이 되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도통 측백나무 잎 속으로 당신을 밀어 넣는, 그녀에게 *시집/ 나는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시인보호구역 단편소설, 벼락에 관한 못된 편견 - 정훈교 아버지는 첩을 들이셨다 아버지는 ..

한줄 詩 2020.06.29

동굴 - 김호진

동굴 - 김호진 사실은 나이란 놈이 사는 집이다 그렇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동굴을 만드는 일이다 박쥐처럼 웅크리는 일이다 나이 들수록 먹은 음식, 반은 위로 들어가고 반은 이빨 사이 갇힌다 빙하를 닮은 하얀 이빨이 거느린 귀여운 크레바스 속으로, 목구멍보다 어둑하지 않으니 일단 별장이라고 해두자 사실 몸에 생긴 수많은 동굴의 문패는 대체로 조금씩 아프거나 애잔하다 쓸쓸함이란 문패는 발가락이 꼬물거려 오히려 깊은 동굴이 아니다.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아, 입 벌리고 있는 어두운 동굴들. 소낙비에 숨긴 울음 같이 아득한 구멍, 그 검은 웅크림이 문패다 4억 5천만년 웅크린 양방산 자락 켜켜이 어둠 덫댄 검고 긴 동굴에선 엷은 햇살이 비집어 놓은 언어의 무늬 따라 종유석이 주름치마를 접었다 폈다 아픔처럼..

한줄 詩 2020.06.29

홀연, 선잠 - 김정수 시집

시집 나오기를 기다렸던 시인이다. 기다리면서 대충 예상은 했다. 천년의시작에서 조만간 시집이 나오지 않을까 했다. 문학 전문 메이저 출판사를 빼면 천년의시작이 가장 활발하게 시집을 내고 있는 출판사다. 한번 눈도장을 찍은 시인이 시집을 내면 검증 절차 없이 선택을 한다. 이 시집이 그랬다. 기대를 비껴가지 않고 모든 시편이 절절하게 가슴에 스며든다. 반복해서 읽고 싶은 시가 많은 시집은 한동안 가방 속에서 출퇴근을 함께 한다. 시집 하나 고르는데 뭐 검증까지야 할지 모르나 나름 검증을 까다롭게 한다. 많은 시보다 좋은 시를 읽고 싶은 사람의 시간 절약 방법이다. 목차에서 눈에 들어오는 시 몇 편 읽고 결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처음 보는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약력이 너무 부실해도 선택에서 제외 한다. ..

네줄 冊 2020.06.29

장마의 시작 - 전윤호

장마의 시작 - 전윤호 며칠 구름 모여들더니 결국 비가 내려 함석지붕 아래 쟁여 둔 슬픔은 사막 메기가 되어 꿈틀거리고 내 방은 도굴된 현실이 되었지 농구 골대 하나 비 맞는 공원에서 길 잃은 기억들 웅성거리는데 천둥이 울리고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를 맞아 이별은 죽지 않더군 *시집/ 세상의 모든 연애/ 파란출판 오늘의 택배 - 전윤호 아직 도착하지 않아 외출도 못 하고 있어 검은 비닐로 포장한 오늘치의 불행 혈압약처럼 먹어야 또 하루가 지나가는 이 익숙한 순서 빼먹을 생각은 없어 정량을 초과하지 않으면 당신이 없는 슬픔도 견뎌야겠지 늦은 날을 기다리느라 아무 일도 못 했어 맞을 매는 빨리 맞아야 다른 잘못도 저질러 보지 그러니 가능하다면 아침 일찍 도착해 주렴 저것 봐 또 한밤에 벨이 울리잖아

한줄 詩 2020.06.29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 정진혁 시집

예전에 어느 지면에선가 시인들이 추천하는 시집 목록을 보고 꼼꼼히 기록했다가 하나 하나 찾아 읽었던 적이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 본다지만 그 고상한 시집들은 대부분 나와 무관한 내용이었다. 그것으로 나의 시 읽기가 완전 하수임을 증명한 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나 다들 졸립다는 지루한 예술 영화는 진지하게 잘 보면서 왜 그런 고급(?) 시집에는 마음이 가지 않는걸까. 새로 생긴 애인에게 자랑할 일도 없는데 내용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읽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명사들이 추천하는 책도 마찬가지다. 분명 그들은 많이 배우고 성공한 사람들이라 내가 쳐다보지 못할 위치에 있는데 그들이 읽은 책은 별로 공감이 없다. 이후 나는 남들이 추천하는 책을 믿지 않는다. 나만의 방식으로 책을 고르고 ..

네줄 冊 2020.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