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심함에 대하여 - 이서화

마루안 2020. 7. 9. 23:00

 

 

무심함에 대하여 - 이서화

 

 

원주 중앙시장 골목,

전을 부치는 솥뚜껑은 어쩌면 저렇게 무심한가

메밀전 배추전 미나리전 감자전

서로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지만

그 묽은 반죽 속에 고작 배춧잎이나

파 몇 대궁이 그 얇은 한 장의 힘인 것을

한참을 서서 지켜보았다

 

고도의 기술이란

다름 아닌 단순하게 손 놀리는 무심함이라는 것

진동하는 냄새의 끝엔

무심한 손끝이 붙어있다는 것

 

찢어지지 않게 얇게 부치는 기술에도

한쪽을 익히고 그 익은 쪽의 힘으로 뒤집는 일

모난 곳 없는 동그란 모양

파치도 없이 부쳐내는 여자의 근심 한 장이거나

산전수전 끝의 달관이다

 

전 부치는 냄새는 문득, 이라는 말

오래된 식욕을 불러오는 냄새 근처엔

비 내리는 날의 처마 밑 기름 끓는 소댕이*가 있다

 

들러붙은 힘으로 익거나,

또 잘 뒤집히는 무심함처럼

올 장마도 시작이다

 

 

*소댕이: 솥뚜껑의 강원도 사투리.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 천년의시작

 

 

 

 

 

 

비 끝 - 이서화

 

 

장마의 맛으로 과일이 익어간다

낙화의 끝, 그곳에서 비는

풀꽃의 생활력이다

한 뼘이 자라고 저마다의 마디가 맺힌다

마디와 매듭은 동향 같지만

결박과 연결이라는 다른 말로 불린다

넓어지는 호박잎은 빗소리 영토고

고구마 줄기는 폭염의 섬유질이다

 

아버지의 장화엔

벌레 몇 마리가 숨어있고

눅눅한 며칠과 바짝 마르고 갈라진

건기 같은 뒤꿈치가 들어있고

폭우에 씻긴 감자 속으로

파란 하늘이 들어찬다

 

풀은 끝이 맛있고

비 끝도 맛있다

 

말뚝에 매어진 고삐의 반경을 뜯어 먹는 소는

비 끝에 뱃구레가 한층 넓어지고

소의 하루는 둥그런 원 안에서

느릿느릿 되새김질 중이다

 

한동안 줄기차게 내린

비 끝엔 찬사와 비난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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