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흐르다 멈춘 곳에 섬이 있었다 - 고성만

마루안 2022. 6. 21. 21:35

 

 

흐르다 멈춘 곳에 섬이 있었다 - 고성만


내가 한 마리 심해어로 태어나
멀어버린 눈 대신
알록달록 지느러미 흔들어
너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세이렌에 홀려
자욱한 안개 속 방향을 잃었을 때
흐르다 멈춘 길 끝
섬이 있었다
돌계단 돌아 올라 도착한 벼랑

밤새 탑 지키던 등대지기는 깊이 잠들었다
이마에 훤한 불 켜고
뱃길 인도하는 일이 저리 고단한가

검은 여 혹은
갯바위 근처 지나 너 찾아가는 일도
그러하다는 것을

뜨겁게 떨군 눈물,
짜디짠 맛을 보고서야 알게 되듯이

 

 

*시집/ 케이블카 타고 달이 지나간다/ 여우난골

 

 

 

 

 

 

파다하다 - 고성만


저수지 뒤쪽 노을이 붉다
노랗고 빨간 지붕 너머
지류의 끝에서 흘러내리는 저녁은 교차로에서
어떤 길로 갈까 망설인다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오직 한 번뿐인 만남을 위하여 평생 기다리는 사람처럼
묵묵히 서 있는 가로등 하나 둘 셋
정류장은 굽 낮은 신발 같다 비 오는 날 주유소는
참을성 좋은 어른 같다 골목 어귀 단골 카페는 다정한 친구 같다
일찍이 술집을 운영하던 사내는
사랑이 물에서 나온다고 믿었으므로
저수지에 둥둥 뜬 채 발견되었다
그로 인해 풀려나온 소문이 파다했지만
사랑의 범위는 매우 넓고 깊은 것이어서
퉁퉁 분 사내의 몸 뜯어먹은 고기들은 살찌고
저수지 옆집 마당에 넌 흰 빨래처럼 배꽃이 환하다
나도 저렇게 연애나 실컷 해봤으면,
생각하는 사이 저녁은
저절로 귓불이 뜨거워진다

 

 

 

# 고성만 시인은 1963년 전북 부안 출생으로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 <햇살 바이러스>, <마네킹과 퀵서비스맨>,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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