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도 긴 세월 앞에 부질없어 - 부정일
빼빼로 데이라는 열하루, 팔십 난 옥금이 누님이
파크골프 치러 회천 구장에 왔네
초이튿날 동갑 영감 먼 길 보내고 벌써 맘
추슬러 평소처럼 곱게 차려입고 공 치러 왔네
있는 듯 없는 무심한 빈자리
오래 산 날들에 묻혀 사소한 일은 아니었지만
공 치러 왔네
폐암으로 먼 길 떠난 영감이야
교장으로 퇴직한 몸이었으니 애들 데리고
뭍으로 수영여행 떠난 것만 같고
안부를 묻는 빈말들이 더 야속한 오늘 같은 날은
일부러 부침개라도 부쳐야 할 것 같은데
한때는 영감의 퇴근을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할 때
분홍 빛깔 떨림 같은 것도 가물가물하니
가야 하는 길, 나 두고 여행 가듯 떠난 사람
인연도 오래 산 세월 앞에 부질없어라
운동 삼아 매일 치던 파크골프도 두 달 넘겨 왔으니
공이란 것이 아무리 둥글다 해도 공, 그것이
간밤에 돌아눕던 쪽으로만 굴러 생각처럼 안 되네
금이 누님이
나갈 대회는 닷새 후로 다가오는데
그것도 모르고 뭍으로 수학여행 떠난 사람은
빈 왕릉 보다가 불국사 지나 석굴암으로 합장하며
오르는 중인 듯,
누님 이마에는 땀만 송송하네
*시집/ 멍/ 한그루
돌집에는 고로쇠나무가 있다 - 부정일
생의 말년에 연이 닿아 정착한
폭낭 아래 돌집에서
손바닥만 한 마당을 서성이다
볕 좋은 의자에 앉아
지나온 날들 회상하는데
고로쇠나무 잎 하나
굽은 등에 앉아 있다
청단이 고와
단풍나무인 줄 알았던 고로쇠나무는
해 기울고 가을마저 겨울로 가는데
홍단은 보여주지 않고
탈색된 잎사귀만 매달아 한 잎 두 잎
떨어뜨리고 있다
폭낭 아래 돌집에서
내 여생도 하루하루
고로쇠나무 잎처럼 바삭하게 풍장 되어
떨어질 것이다
한때는 나 자신이
오색 단풍나무인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을이 절정이면
단풍은 산마다 지천인데
청단이 고운 고로쇠나무는
돌집 마당에 있고
내가 좋아하는 노을빛 단풍은
산에 있다
풍장 끝에 내가 가야 할
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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