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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솎으며 - 홍신선

열매를 솎으며 - 홍신선 그동안 먹었던 과일 하나도 실은 얼마나 숱한 다른 도사리들의 희생과 헌납이 깊이 떠받들어진 것이었는지 간 봄날 쏟아져 나와 천지를 꽉 매웠던 그렇게 잠시 공중에 우르르 몰려나와 얼굴 붉히던 복사꽃들 지고 꽃자리마다 만원 전동차 안처럼 다닥다닥 매달린 작은 열매들 나는 그걸 솎아 준다고 나뭇가지에 성상(性狀) 좋은 놈 한둘 남기고 다 훑어 내린다. 그래도 결실 떠안을 놈만은 악착같이 움켜쥐고 매달린다. 그 풋열매는 떠맡은 그대로 이내 제 곳간을 열어 햇볕과 바람 그리고 끝내는 이 건곤마저 들여 쌓겠지. 올해도 잘 익은 복숭아 몇 알의 채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익지 못할 풋실과들이 죽어야 했는지 솎임을 당해 붕락했는지.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낙과를 보며 - 홍신선 완..

한줄 詩 2022.07.17

밥풀에 대하여 - 김신용

밥풀에 대하여 - 김신용 밥풀때기라는 말이 있다 쓸모없고 하찮은 것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유난히 정겨울 때가 있다 아기의 입가에 붙은 밥풀을 얼른 떼어 제 입에 넣는, 어미를 보는 날이다 이런 날은 쓸모없고 하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참 눈에 밟히는 날이다 밥풀 하나가, 마치 소우주처럼 눈앞에 밝아오기 때문이다 *시집/ 너를 아는 것, 그곳에 또 하나의 생이 있었다/ 백조 소금꽃 - 김신용 아무도 이 꽃을 본 적 없지만, 이 꽃은 있다 땀 흘려 일해보면 안다 사람의 몸이 씨앗이고 뿌리인, 이 꽃—. 일하는 사람의 몸이 소금이 꽃인, 이 꽃—. # 김신용 시인은 1945년 부산 출생으로 1988년 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 , , 등이 있다.

한줄 詩 2022.07.17

자기 해방의 태도 - 박노해

자기 해방의 태도 - 박노해 세계에 대한 참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을 굳게 신뢰하는 것 쉽게 인정받거나 쉽게 실망하지 말고 숫자에 좌우되지 않고 나아가는 것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서로의 고독을 기꺼이 견지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 완전한 일치를 바라지 말고 고유성을 품고 공동으로 협력하는 것 삶의 자율과 인간의 위엄을 지키며 불의와 맞서 끈질기게 전진하는 것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긴 호흡으로 사랑하고 일하고 정진하는 것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신은 감사를 거절한다 - 박노해 만약 내가 팔레스타인에 태어났더라면 만약 내가 아프카니스탄에, 이라크에, 버마에, 다르푸르에, 북한에 태어났더라면 가난과 분쟁과 억압의 나라 앞에서 피와 눈물에 젖은 사람들 앞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감사하다면 저들의 불..

한줄 詩 2022.07.17

남해 도솔암 - 이우근

남해 도솔암 - 이우근 도솔암 가는 길은 굽이마다 형편대로 눕는다 그리고 불시에 일어나 하늘까지 닿는다 바람소리에 해조음(海潮音)이 들린다 산은 조바심 없이 밭은기침으로 자신의 벽을 연다, 아무도 모른다 마음이 바르다면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무슨 상관이랴 높낮이의 위치가 무슨 상관이랴 낙엽과 해초가 이웃이지 말란 법도 없다 잦은 바람이 물결로 이마를 어루만질 때 비로소 미망(迷妄)을 따져본다 사람들의 계산은 이미 부질없지만 더하고 곱해도 빼고 나눔은 없더라만, 그래도 곱씹은 아득한 희망 손톱 깎듯 낮달을 똑, 따서 발바닥 아래 던져 꽃피길 바란다 등산화 신은 나를 제치고 고무신 신은 노보살이 땀조차 흘리지 않고 휑하니 지나간다,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 쪽박 때리듯 두들겨 패는 목탁 소리 결코 풍경 소리 이..

한줄 詩 2022.07.16

벗, 그대는 안녕한가 - 부정일

벗, 그대는 안녕한가 - 부정일 혼자 벽 보며 잠들다 이른 새벽 거울을 보네 거울 속에 흰머리 노인이 나를 보네 어느 길가쯤에서 만났던 사람 같은 싸락눈 오다 그친 마당을 서성이네 창 너머 아내가 티비 보는 거실 몇 번 훔쳐보면서 온기 없는 마당만 서성이네 달랑거리던 불알은 이미 없는 듯 쪼그라들고 아버지 귀두 닮은 작은 흔적 주섬주섬 찾아 후미진 구석 몇 방울 흘리고는 아내 외출에 동동거리던 자 안으로 드네 어디를 가시는지 말하지 않네 언제쯤 오시는지 물어보지 못하네 물어본다는 것이 쓰나미 같은 것이어서 무관심해야 할 노인이 감당 못할 일이어서 꽃피던 시절은 이미 익숙해진 절망이어서 이제는 다 내려놓고 절망마저 다독일 때 하찮은 외로움이야 공원 어디쯤 사연 많은 사람들 모여 있는 곳에 가면 될 일 벗이..

한줄 詩 2022.07.16

모든 의자는 평등하다 - 소동호 사진전

그냥 지나칠 뻔한 전시회를 보았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전시회도 만날 인연이면 볼 기회가 주어지는가 보다. 이 전시가 그렇다. 인사동 전시장 몇 군데를 돌면 보통 종로 쪽으로 향한다. 오늘 점심을 먹기 위해 헌법재판소 쪽으로 이동하다 이 전시를 만났다. 만났다기보다 전시 포스터가 안내를 했다는 게 맞겠다. 별 기대 없이 들어갔다가 홀딱 빠졌다. 소동호 작가는 지난 5년간 오직 의자만을 찍었다. 서울 길거리 의자 프로젝트다. 이 작가가 마음에 든 것은 그가 찍은 의자가 한결같이 낡고 초라하다는 거다. 전시장에 걸린 사진 숫자는 거의 400여 장에 가깝다. 전시 공간의 한계인지는 몰라도 옆서 크기의 사진을 촘촘하게 배치를 했다. 오래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다. 내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세상을 나왔는지는..

여덟 通 2022.07.16

거짓말 이력서 - 성은주

거짓말 이력서 - 성은주 최초의 거짓말은 여섯 살 놀이동산에서 시작됐다 엄마는 내 손에 풍선 끈을 쥐여주었다 놓치지 마 정말 먼 곳으로 사라지는지 궁금해서 일부러 풍선 끈을 놓았다 엄마 원피스 자락을 붙들고 혼날까 봐 더 크게 울며 놓친 척했다 캉캉춤을 추던 무용수가 내 최초의 거짓말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 후로 종종 거짓말할 때마다 속치마 들썩이듯 넘어지는 꿈을 자주 꿨다 * 함께 차 타고 커브를 돌 때 연인의 머리카락도 길어졌다 우리의 교집합에 또 다른 동그라미가 빗금을 쳤다 당신은 너무 아래에 있어요 계속 그어지던 선 지우는 방법을 몰랐다 긴 통로에서 과일 껍질처럼 앉아 있는 당신을 내가 지워 놓고 당신이 날 떠났다고 슬픈 척했다 갓 지은 쌀밥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올 때 금방 식을 거라 생각했다 매..

한줄 詩 2022.07.12

내 눈치도 좀 보고 살 걸 그랬다 - 이명선

내 눈치도 좀 보고 살 걸 그랬다 - 이명선 마음이 마음 같지 않아 천천히 병을 얻었다 생각날 때 밥을 먹고 너와 함께 골목을 걸어 봐도 내 골목은 끝으로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아무 날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사랑을 이어 불렀지만 엄마의 딸이라 말 못 하는 헛꿈만 꾸곤 했다 나를 앞질러 가는 세상에 적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림없는 이야기를 어림잡아 보려는 사람처럼 한 발 뒤로 물러나 나 같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무 날은 아무렇지 않길 바라며 겪지 말아야 할 일을 일찍 겪은 사람과 겪을 일을 먼저 겪은 사람에게도 남은 미래가 있어 나를 보면 조바심이 난다는 엄마의 말을 수긍하기로 했다 이 골목에 비가 그치면 반짝 낮더위가 시작되겠지만 늘 그렇게 무엇엔가 홀려 왔던 것처럼 나를 넘겨짚다가 골목의 끝과 마..

한줄 詩 2022.07.12

진짜 사나이 - 박수서

진짜 사나이 - 박수서 진짜 사나이가 되려나 봐 월화 드라마, 수목 드라마, 주말 연속극까지 꼼꼼하게 챙겨 보고 있어 극의 전개를 상상해 보거나, 방송 시간이 되면 대폿집에서 잔 놓고 집으로 들어오기도 해 탤런트 대사에 웃고, 욕하다가 때때로 고양이 눈망울로 뚝뚝 눈물도 흘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먹을 저녁 끼니는 머릿속으로 짜놓아야 해 돼지 앞다리를 찌개를 할까, 두루치기를 할까, 오징어를 볶을까, 문어는 좀 비싸니까 다음에 해 먹어야지 생각하다 조금 싼 닭똥집이나 껍데기를 볶는 날이 허다해 뼈 튼튼, 눈 맑은, 간 좋은, 전립선 힘쓰는, 폐 영양, 관절 팔팔, 장 콸콸, 피부 탱탱 건강기능식품은 거르는 날 없이 먹고 있어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살아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면 증기기관차 화..

한줄 詩 2022.07.11

내가 날아오른다면 - 박금성

내가 날아오른다면 - 박금성 늦은 겨울밤 13층 건물의 옥상 난간 위에 앉아 있다 내가 젖먹이 때 발견된 곳은 파출소 옆 아기용 젖꼭지를 물고 있더라고, 방긋방긋 웃더라고 우는 아이는 버려진 아이 웃는 아이는 발견된 아이 발견된 나를 멀리하는 학교 아이들 발견된 놈을 멀리하는 문구점 누나 발견된 짐승을 멀리하는 붕어빵 아줌마 버려지는 것은 휴지와 머리카락 그리고 짐승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보석 발견될 수 있는 것은 휴지도 머리카락도 짐승도 보석도 그 사람이 버려진 아이는 사람 될 수 없다며 장난감 박스를 내려놓았다 난 버려지고 발견된 짐승 사람의 가죽으로 사람이고 싶어 날아오른다 *시집/ 웃는 연습/ 서정시학 유년의 뺨 - 박금성 철새들이 창공을 가르며 날아가고 갈라진 허공에서 태어나는 구름 사이로 아..

한줄 詩 2022.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