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바람이 - 변홍철
골목 한쪽 꽝꽝 울리던
능소화 모가지들이 뚝뚝 떨어졌다
그들의 말을 채 알아듣기도 전이었다
장마가 퍼붓기 전, 예비검속을 피해 몸을 숨기듯
도피가 아니라 차라리
환멸과 단절하듯
이것은 하나의 의지,
무리 지어 피었어도 언제나 고독했다고
담장 이쪽과 저쪽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고
무심한 발길에 차이기 전에
그중 몇 송이라도 추념 가득한 책장 한쪽에
꺾어두지 못한 것을 서러워 말자
짙은 초록의 허공, 흔들리는 역사의 넝쿨을
차라리 이 시각, 응시할 일
다른 바람이 동네 이곳저곳을 탐문 중이다
*시집/ 이파리 같은 새말 하나/ 삶창
꽃길 - 변홍철
바람 부는 대로 떠밀려도
어느 구석엔가 겹겹이 쌓여
이어지는 길, 다시 바람길
꽃잎이 하얗게 떨어진다
대출이자 독촉처럼
검은 나무 뒤로
눈부신 그림자 하나 숨는다
오랫동안 같이 가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이
버티는 길이라고
이파리 같은 새말 하나 틔우는 것이
또 사는 길이라고
# 변홍철 시인은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살고 있다. 시집으로 <어린 왕자, 후쿠시마 이후>, <사계>, <이파리 같은 새말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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