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진처럼 꽃피다 사라진 - 성은주

마루안 2022. 6. 22. 21:29

 

 

지진처럼 꽃피다 사라진 -  성은주

 


우린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버려진 상처의 속도만 기억할 뿐
출발선에서 신발을 챙기고
오래된 지도를 꺼내 보았는데
발자국으로 표시된 자리마다 파도가 출렁인다

 

외로운 물고기들이 서로 몸 비빌 때

잃어버린 부표가 떠오른다

 

지구 어딘가 찍힌 발자국으로

아무가 아무에게 아무를 아물게 하는 저녁
모퉁이는 잡히지 않고
낙서 가득한 얼굴들만 가득하다
읽어 내지 못한 감정에
다시,

발밑에서

꽃들이 진다

 

손잡이 없는 문을 열 때마다

당신의 어딜 만져야 할지

 

어제부터 회전목마는 멈추지 않고

대화가 필요한 밤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신발만 가득하다

 

때론 내가 아닌 다른 누구이고 싶을 때가 있다

 

종이에 글씨를 눌러쓰면

꾹꾹 누르던 표정이 떠올라 공책을 덮고

공책은 당신을 지우고

또 지우다가

책상 밑으로 숨고

 

산에서 산으로 번지는

당신, 붉게 밑줄 긋고 가는

당신, 지진처럼 꽃피다 사라진

 

싱크홀처럼 꽃들이 진다

 

신이 숨겨진 지뢰를 밟아 사방으로 터져 버린 걸까

 

 

*시집/ 창/ 시인의일요일

 

 

 

 

 

 

다이빙 - 성은주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살갗이 스치고
조금씩 식어 가는 귀퉁이가 만져지고

아무 대답 없이 늘 잔잔한 얼굴로
나를 걸어 두는 당신

허공에서 펄럭이는 기분을 드문드문 새들이 읽어 준다

높으면 높을수록 당신에게 깊게 파고들어 갈 수 있겠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높이에서
차가운 마음에 발목을 걸고
세상을 뒤집는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이 대단하다며
당신을 향한 내 떨림을 올려다본다

원한다면 더 올라갈 수 있어
언제라도 짜릿하게 뛰어내릴 수 있으니까

젖은 머리카락은 말려 주지 않아도 돼

 

 

 

# 성은주 시인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한남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창>이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둠이 드는 저녁 들판에 서서 - 류흔  (0) 2022.06.25
마수걸이 - 서화성  (0) 2022.06.22
다른 바람이 - 변홍철  (0) 2022.06.21
흐르다 멈춘 곳에 섬이 있었다 - 고성만  (0) 2022.06.21
봄의 감정 - 이설야  (0) 2022.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