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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 - 우남정

지리멸렬 - 우남정 화마가 고시원 쪽방에 잠든 노인을 삼켰다 술 취한 자동차가 버스 기다리던 청년을 들이받았다 노인이 치매인 91세 아내의 목을 졸랐다 한 여자는 전 남편의 칼날에 온몸을 찔린 채 주차장에 숨져 있었다 해일이 강타한 바닷가에 겁에 질린 여자가 울고 있었다 몇 놈이 악어에게 먹히는 동안 누 떼들이 핏빛 강을 건너고 있었다 먹방 프로에서는 한 세프가 아귀찜 비법을 떠들고 있었다 홈쇼핑에는 대박을 부추기는 경품 추첨이 한창이었다 꾹.. 꾹.. 꾹.. 채널이 돌아가고 있었다 저녁이 저물고 있다 다행이다 목숨 걸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서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굴헝 - 우남정 저녁이었다 덤불 속 별똥별이 떨어진 자리였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한줄 詩 2020.09.27

흘리고 다닌 것들 - 류정환

흘리고 다닌 것들 - 류정환 나이 겨우 오십 중반인데 뭘 자꾸 흘린다. 반찬을 집어 먹다가도 흘리고 물을 마시다가도 흘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더러는 오줌 누다가도 찔끔찔끔 흘린다. 그러고 보니 애늙은이 짓 삼십 년 이것저것 흘리고 다닌 게 전부라! 청춘을 흩날리는 꽃잎이라 흰소리를 하며 아까운 줄 모르고 흘리고 다녔지. 풍성하던 머리카락도 알게 모르게 다 흘리고 그 밝던 눈도 속없이 빼앗겨서 본데없이 눈앞은 어둡고 귓속에는 사철 매미가 들어앉아 산 지 오래, 여기저기 술값을 흘리고 다니느라 알량한 주머니 그나마도 비고 야무졌던 꿈은 다 어디다 흘려버렸는지 가슴도 헐렁하고 아, 부질없이 흘리고 다닌 말이며 글들은 또 어쩔 것인가! 가뭇없이 흘리고 다닌 것들 저기 어디쯤 저무는 길가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

한줄 詩 2020.09.26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 김인자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 김인자 첫 결혼기념일이 이혼기념일이 된 후배의 변은 걷잡을 수 없는 남편의 바람기가 원인이란다 40년을 한 남자와 살고 있는 나도 실은 한 남자와 사는 게 아니다 영화나 소설처럼 호시탐탐 친구의 애인을 넘보고 선후배에게 추파를 던지고 이웃사내에게 침을 삼켰다 단언하지만 이런 외식이 없었다면 나야말로 일찍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 결혼제도란, 한 여자가 한 남자만을 거래할 수 있도록 규정지어진 공소시효가 불분명한 합법을 가장한 희대의 불법 사기극, 나는 달콤한 미끼에 걸려든 망둥어, 위장취업자, 아니 불법체류자, 결혼이라는 기업에 청춘의 이력서를 쓰고 정규직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상근봉사자, 가문의 대소사엔 대를 이은 비정규직 노동자, 자식에겐 만료가 없는..

한줄 詩 2020.09.26

숨어 사는 영혼처럼 - 강인한

숨어 사는 영혼처럼 - 강인한 외딴 섬으로 가는 다리였다. 버스는 오 분쯤 달려 섬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널 때 창밖으로 바다가 아득하였다. 파랗게 보이는 높고 소슬한 하늘, 아래에 어두운 보랏빛, 그 아래 먹구름과 양털구름이 뒤섞이고. 청동의 파도주름과 맑은 햇빛, 색색의 구름들,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사이사이 구름을 뚫고 단숨에 꽂히는 바닥은 은빛 바다였다. 햇빛을 줄기줄기 온몸에 받아 적는 보얀 구름커튼에 잡티 하나. 차창에 묻은 티끌일까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점점 키워보니 아뜩한 하늘에 아, 숨어 사는 영혼처럼 혼자 날고 있는 새였다. *시집/ 두 개의 인상/ 현대시학사 깊은 숯을 마음에 다스리고 - 강인한 산 빛깔이 엷어지고 슬픔은 극약처럼 짙어진다. 몰래 숨어 지켜보는 어떤 눈빛이 ..

한줄 詩 2020.09.26

다시 가을 - 김남조

다시 가을 - 김남조 다시 가을입니다 긴 꼬리연이 공중에 연필 그림을 그립니다 아름다워서 고맙습니다 우리의 복입니다 가을엔 이별도 눈부십니다 연인들의 가슴앓이도 지금 세상에선 수려한 작품입니다 다시 만나려는 나의 축원도 가을이어서 진심이 한도에 닿았습니다 그간에 여러 번 가을이 다녀갔는데 또 가을이 수북하게 왔습니다 이래도 되는지요 빛 부시어 과분한 거 아닌지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의 복입니다 *시집/ 사람아, 사람아/ 문학수첩 노년의 날개 - 김남조 삐걱거리는 내 뼈는 몸 안의 자잘한 사슬이며 허허로운 모래밭에 내 순정의 파편들이 쌓이고 그 위에 질펀한 노을 애련하구나 늙는 일 서툴러서 깃털 줄어도 더 줄어도 날아오르려 애쓰는 내 노년의 날개

한줄 詩 2020.09.23

아무튼, 딱따구리 - 박규리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 모처럼 큰 울림을 주는 책이었다. 이 책은 크기가 시집보다 작은 아담한 문고본이다. 반면에 내용물은 그 어떤 책보다 감동과 배움을 주었다. 흔히 책이 마음의 양식이라는데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디자인 연구원이다. 저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해 엄청 생소한 분야인 지속가능 디자인 전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케임브리지 대학 공대 산하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겪은 일을 이 책에 담았다. 책 내용은 환경오염을 막고 자연 친화적인 삶을 지향하자는 말이다. 딱따구리가 기준점을 잡아 준다. 사람 주변에 숲이 사라지면서 딱따구리를 보기 어렵다. 저자는 세 개의 주거 공간에서 딱따구리를 만난다. 그래서 강릉 딱따구리, 케임브리..

네줄 冊 2020.09.23

타원에 가까운 - 강혜빈

타원에 가까운 - 강혜빈 ​ 정원을 반 바퀴 도는 데 두 계절 ​ 당분간 입에서 풀냄새가 나도 괜찮니? 잘 봐, 기대와 실망을 한 군데에 심으면 얼마나 잘 자라는지 무른 말에도 잘 베이는 나뭇잎들은 어떻게 초록인지 ​ 구멍 난 하루를 걸치고 나서는 산책 흰 조랑말들의 발자국이 만든 밤은 길었어 나와 친해진 것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곳에서 잘 얼었지 ​ 뾰족한 얼음들을 재워놓고 내가 나인 것을 참아보기로 했어 칭찬을 한 잔 마시고 싶거든 기다란 혀를 감추고 정확하게 웃어봐 ​ 너의 끝과 나의 끝은 일직선으로 달라질 수 있어 너무 넓어서 슬픈 정원은 형용사가 될 수 있어 이별은 한 마디의 음절만 가질 수 있어 ​ 우리를 한 군데에 심으면 누구부터 시들까? 아무렇게나 자란 마음에게는 차가운 물이 좋아 소심한 게..

한줄 詩 2020.09.22

눈먼 치정 - 이소연

눈먼 치정 - 이소연 피 터지도록 싸우고 발바닥공원을 지나는데 사이사이 놓여 있는 빈 벤치들 숲속도서관은 문이 닫혔고 야외무대의 음악회마저 무기한 연기된 발바닥과 발바닥이 번갈아 기록하는 별 볼 일 없는 산책 한 번 속고 또 속고 권태에 빠진 일상은 도도하지만 나는 기어코 동사무소엘 간다 혼인신고 출생신고 전입신고도 했으니 남편도 신고해 볼까 하고 말 하나가 가슴에 창을 내고, 그 창에 화염이 어릴 때, 불구덩이 속에서 새도 죽고 구더기도 죽는 순간 나도 죽었는데 욕지거리하며 문밖으로 나간 그림자만 살아 있다 나는 그림자마저 산 채로 묻어버릴 거다 늘상 중얼거리는, 나무 뒤편에서 낄낄거리는 꽃잎들이 불쾌하다 팔 다리 뒤엉켜버리는 이 터무니없는 간격을 왜 그리도 사랑했을까 이혼서류에 들어앉은 참새 소리는 ..

한줄 詩 2020.09.22

줄포의 새벽 - 김윤배

줄포의 새벽 - 김윤배 줄포의 새벽은 이슬로 시작된다 이슬의 일생은 절망의 한나절이 아니다 한나절은 죽음으로 이루어낸 황홀한 소멸과 슬픈 귀환 사이에 있다 건너다보면 아릿하지만 마주서면 따스해서 서러운 -바다와 사람 사이 사이에 얼마나 많은 초혼의 눈물이 누워 있는지 만월은 안다 사이를 노래하기 위해 바람은 파도 위의 흐린 섬들을 순례한다 사이에 어둔 사람을 놓고 붉은 하늘을 놓는다 저 안타까운 몸짓들, 생각들, 말들이 필생이라면 한 사람을 미친듯 따라나선 줄포의 새벽이어도 좋았다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카사블랑카의 밀항 - 김윤배 내 밀항 음모는 늘 조명 낮은 째즈카페였다 모든 인연은 카사블랑카에서 시작되었다 흑백 필름은 세상을 밝음과 어둠으로 나눈다 나는 어둠이었다 밀항을 ..

한줄 詩 2020.09.21

빚으로 빚는 생(生) - 김이하

빚으로 빚는 생(生) - 김이하 한때 야무진 꿈도 없었을 것 같은 이 허우대를 이끌고 가는 것은 빚의 힘이다 감감하던 세월이 이젠 겅중겅중 나를 뛰어넘으며 더는 끌고 갈 힘도 없는 나를 잡아끄는 하루 차라리 그 그림자에게 비굴한 사정이라도 하고 싶은 또 하루 그동안 먹고 싼 것들은 이미 하수구로 흘러가 버렸는데 외상값은 카드 명세서에 빼놓지 않고 박혀 있다 아득한 돈의 숫자들 돈을 빼어다 쓸 일도 하지 못했고 그나마 가망도 없이 하염없이 구원의 목소리를 기다리다 지쳐 이제는 웃음거리나 찾다 누워 버렸는데 엊그제 산에서 본 뿌리 뽑힌 나무처럼 나도 어느 결에 꽈당 무너지고 싶다 태풍이라도 오는 날 그 언덕에 서서 내가 봐도 선하게 남아 있을 마지막 그 모습 어느 날 다시 길을 간다면 몸 하나 누일 그런 곳..

한줄 詩 2020.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