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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개 같은 날들의 기록 - 김왕노

여전히 개 같은 날들의 기록 - 김왕노 개 같은 날들을 기록하는 사내가 있다. 시골로 내려가 파초 이파리에 새파란 하늘 모서리에 허기지나 빈틈없는 정신으로 전심전력으로 개 같은 날이므로 세상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명아주 그림자처럼 흔들리다가 세상에 저런, 저런 하다가 인간 말종들이라 하다가 그는 한 몸이 된 듯 앉은 의자에서 개 같은 날을 기록한다. 청무 굵어갈 때 논병아리 우는 날에도 기록한다.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는 개 같은 놈 자신도 언젠가 반드시 피눈물 흘리게 될 것이라며 내 울던 골에 너도 울게 될 거라며 벼가 끝없이 물결치는 벌판 위에다 모호한 안개에다 소쩍새 울음 위에 경칩이 뜨거운 울음 속에 개 같은 날을 천천히 기록하는 것이다. 잉크 같은 가슴에 펜을 푹 담갔다가 기록하는 것이다..

한줄 詩 2020.09.20

램프의 사내 - 정병근

램프의 사내 - 정병근 밥과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대의를 좇아 30년을 떠돈 끝이었다 서쪽에서 해가 뜨고 염소가 나무에 오를 일이었다 아내는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퇴근 때마다 가지런한 그릇들을 보고 뜨악해했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내가 설거지한 흔적을 탐색했다 나는 검열을 앞둔 군대처럼 싱크대 구석구석까지 말끔하게 닦아놓았다 밥솥을 씻고 밥도 지어놓았다 아내는 지휘관의 표정으로 의기양양해했지만 한두 달이 지나자 조금 어두워지면서 컵이나 음식 쓰레기 같은 걸로 꼬투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당신은 이제 평생 설거지 안 해도 돼, 이런 말끝에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아내도 눈이 빨개졌다 나를 추궁할 일이 설거지밖에 없는 아내여. 말을 뺏기고 정치라곤 나밖에 모르는 사람아, 얼떨결에 노역의 한구석을 잃은 아내..

한줄 詩 2020.09.20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 이병률 시집

얼굴 보고 시인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가장 시인처럼 생긴 사람이 몇 명 있다. 그중 하나가 이병률 시인이다. 청바지에 면티 한 장 달랑 걸쳤는데도 시인처럼 보이고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에서 저 사람 시인일 거야 이런 느낌이 오는 사람 말이다. 예전에 그의 첫 시집 를 여러 번 읽으면서 굳어진 선입견이다. 두 번째 시집 도 꽤나 반복해서 읽었다. 아마도 두번 째 시집이 창비에서 나왔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세 번째 시집부터 그의 시와 잠시 멀어졌다. 이 사람도 드디어 문단에 줄 서기를 시작했구나. 이건 나의 일방적인 생각이다. 그의 시집을 빼 놓지 않고 달달 외우면서 읽었듯이 산문도 부터 빠짐없이 읽었다. 그중 여행 산문집 을 맨 앞에 놓는다. 그 안에는 각종 인연의 끈을 쫓아가듯 여행지마다 단편 영화 ..

네줄 冊 2020.09.20

폭우반점 - 조우연 시집

기대하지 않고 읽은 시집인데 대번에 빠져서 읽었다. 이라는 제목 또한 특이하다. 톡톡 튀는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흡인력이 있다. 처음 접하는 시인인데 이름처럼 정말 우연으로 읽었다. 이런 시인도 있었어? 서점 시집 코너에 가면 정말 모르는 시인이 많아서 눈이 바쁘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름도 있고 동명이인의 시인이라 헷갈리는 시인도 있다. 같은 시인인 줄 알고 주문했는데 이름만 같고 엉뚱한 시집을 접할 때도 있다. 조우연 시인은 이 시집이 첫 시집이다. 어디서도 접해 보지 못한 개성 있는 시가 문장 속에 오래 머물게 한다. 달착지근하지 않아 다소 불편한 싯구이나 머물고 나면 힐링이 되는 문장이다. 구체적 생활 체험이나 구질구질한 인생으로 치부할 밑바닥 삶에서 자신 만의 방식으로 삶의 애환..

네줄 冊 2020.09.19

이사 - 조우연

이사 - 조우연 겨우내 그려낸 천장 곰팡이 구름 아래로 그늘 없이 날아가는 어린 딸애의 비행기 벽화는 그냥 두고 간다 죽자고 올라서던 베란다 난간 위에 뜨던 달 그건 어차피 이 집에서 들어올 때부터 있던 거다 부엌과 화장실의 근접, 강장동물처럼 구토와 배설을 식음과 혼돈했던 버릇은 잘 묶어 문가에 내논다 밤마다 여자의 얼굴에 푸른 절망을 새기던 304호 남자의 망치는 돌려주었나 짐을 다 싸고 306호의 늙은 여자가 준 무장아찌에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아들이 다녀간 날 신발장에 남은 숨을 매단 그녀를 빈 그릇째 태우고 간다 그렇게 떠난다, 그런데도 미어질 듯 용달은 흔들리고 집은 부동산이 아니다 *시집/ 폭우반점/ 문학의전당 면목동 반지하 - 조우연 밀린 세를 받으러 갔네 반지하 셋방이 잠수정처럼 어둠에 ..

한줄 詩 2020.09.19

내 삶을 누군가 대신 꺼내 쓰고 있다 - 이병률

내 삶을 누군가 대신 꺼내 쓰고 있다 - 이병률 내 삶을 누군가 대신 살아주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몇 초만큼도 안 되는 내 하루는 아무 쓸모가 없거나 사나흘에 한 번쯤은 비겁하기도 하니까 우연히 잡힌 라디오 전파와 그 전파를 다시는 잡지 못하는 날들 누구는 그 전파를 나 대신 사용하겠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질문 혹은 대답 누구는 그 질문과 대답으로 며칠을 살겠지 인생을 나 스스로 살아가는 사막과 누가 대신 살아주는 남극 그 둘의 배합으로 버무려진다 인류가 울음과 기후의 사용을 멈추지 않았듯이 한사코 불속으로 들어가 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고 걸어나오는 사람은 내 삶을 대신 살아주느라 불을 덮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토록 살고 있는 것은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 ..

한줄 詩 2020.09.19

오우아, 나는 나를 벗 삼는다 - 박수밀

이 책의 저자 박수밀 선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 고전을 쉽게 해석해서 대중적인 문장으로 쓴 저서를 몇 권 내기도 한 부지런한 학자다. 나를 벗 삼는다는 문구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럼 이 제목을 어디서 가져 왔을까. 雪之晨 雨之夕 佳朋不來 誰與晤言 試以我口讀之 而聽之者我耳也 我腕書之 而玩之者我眼也 以吾友我 復何怨乎! 눈 오는 밤이나 비 오는 밤에 다정한 친구가 오지 않으니 누구와 얘기를 나눌까? 시험 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니 듣는 것은 나의 귀요, 내 손으로 글씨를 쓰니 구경하는 것은 나의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으니 다시 무슨 원망이 있으랴! 나를 벗 삼는다는 문구는 물질만능 시대에다 난데 없는 코로나 시기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저절로 부자가 되는 재벌 자제가..

네줄 冊 2020.09.18

해양극장 버스정류소 - 박서영

해양극장 버스정류소 - 박서영 이 도시에 바다가 있다고 했지만 바다는 군인의 것, 벚꽃은 연인들의 것 벚꽃 핀 나무 아래 버스 정류소에서 연인들은 꽃의 눈을 감겨주며 헤어졌고 타지에서 온 사람은 극장이 어디 있나 찾게 되지만 한때 바다극장이 있었다는 풍문만 떠돌 뿐, 소문은 무엇이든 닿기만 하면 아름답게 변하고 추억을 소환해오지요 꽃의 정령이 있는 것처럼 소문에도 정령들이 살아요 끝난 이야기를 끝없이 동시 상영하는 극장은 가열하면 할수록 물방울이 맺혀요 여전히 군인들은 바닷물 속에 빠진 군화를 신고 애인을 만나러 나오지요 아, 현수막도 하나 붙어 있군요 잭나이프를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니 조심하세요 떠돌고 있는 이야기를 불 곁에 오래 두면 물방울이 맺히고 흰 시간들이 남아요 군인이 살고 있다는 바다가 어디..

한줄 詩 2020.09.18

양지사우나 - 김정수

양지사우나 - 김정수 사막을 통째 뒤집어 사막으로 들어갔다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건 시간이나 둥근 나무의 건망이 아닌 모래의 지루한 순응 함부로 벗어날 수 없는 방에서 투명한 방으로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만 하는 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세월을 쌓고 또 쌓는 일 툭하면 그만 끝내자 화르락 문 열고 나간 당신이 하루 이후 돌아와 벽을 향해 비스듬히 눕던 일 밤새 뒤척이다 일어난 아침은 좁은 길로 탈출하고 더 깊어지기 전에 뱃속에 소문 들어서기 전에 서로의 출입문 달리하곤 끝내 발목의 속도 늦추는 일 반복된 바람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오랜 습관에 모질게 모래언덕 넘어가는 일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 동거는 고비 같고 출입문에 찍힌 지문처럼 우연한 조우 당신은 한낮의 햇빛 구름처럼 벗어난 것인지 수건으로 낯선 ..

한줄 詩 2020.09.18

여주 - 최성수

여주 - 최성수 한때 여주에서 늙어가고 싶었다 어린 당나귀 한 마리 벗 삼아 두텁나루에 빈 낚싯대 던져두고 섬강 물살처럼 천천히 흐르고 싶었다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에서 이제 나는 고집 센 늙은 당나귀 같은 아내와 낚싯대 대신 앞산 그늘이나 바라보며 멍하니 늙어간다 아내는 고집스레 내 병에 좋다는 여주로 만든 음식을 해낸다 여주에 사는 대신 여주를 먹으며 나는 때때로 오래전 가르쳤던 여주란 아이를 떠올리기도 하고 여주 고을처럼 곱게 늙어가는 법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생은 여주의 맛처럼 지독히 쓰고 조금만 상큼할 뿐이다 그저 그 쓴맛을 달게 받아들이며 남은 세월을 견뎌내는 것, 그 끝에는 텅 비어 고운 노을이 남아 있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은 것이다 올해도 내년에도 여주는 울퉁불퉁 자라다 ..

한줄 詩 2020.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