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 느닷없는 - 권혁소

마루안 2020. 9. 17. 18:45

 

 

사랑, 느닷없는 - 권혁소

 

 

검버섯은 피고

근육은 점차 소멸할 때

물매화를 닮은 아린 사랑 하나

내게로 와서

꽃 피우라

속삭인다

 

혼자 잠드는 일에 익숙해지던,

맹물에 끼니를 마는 날들이 늘어나던

오월의 어떤

신록 무렵이었다

 

뒤늦은 사랑은 그렇게

느닷없다는 말과 함께 와서

격조했던 언어들에게 말을 걸고

화석이 되어가던 심장에

맑은 물줄기 하나

흘려놓았다

 

사랑 그것은 광장을 밝혔던 촛불 같아서

내가 어두울 때 비로소 나를 환하게 한다

 

어떤 꽃은 지고

어떤 꽃은 피던 때였다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바다처럼 잔잔히 밀려오는 사람 - 권혁소

 

 

나중에 당신을 기억할 때

바다처럼 잔잔히 밀려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오물오물 뱉어내던 그녀의 말을

잔잔히 밀려오는 바다 같은 사람이라면 좋겠어요,라고 읽는다

 

사람과 바다 사이에 사랑이 있다 결코

쉽게 헤엄쳐 건널 수 없는 거리

손 내밀면 멀어지는 섬처럼

오도카니 떠 있는 실루엣, 그것이 사랑이라니

 

사랑도 흙처럼 만질 수 있는 것이어서

만드는 이의 손길에 따라

꽃병이 되거나 사발이 되거나 접시가 된다면

나는 이 전율을 주물러서 무엇을 만들게 될까

 

한 걸음 다가서면 두 걸음 물러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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