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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 수 없는 한순간 - 김이하

어찌할 수 없는 한순간 - 김이하 아침에 한 사내가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간밤엔 그가 어느 건물의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 땅덩이가 움찔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는구나, 마음 끝자락 하나 기댈 수 없어 가는구나 싶어 한없이 우울한 가을빛이 창을 가득 메운다 저 푸른 하늘은 왜, 쓸쓸한가 가슴 깊은 곳의 눈물까지 길어 올리는가 퍼렇게 멍든 마음들 하나의 바람으로 꺽꺽 울며 외치는 시위(示威)구나 싶은데 살고 싶어 죽을 만큼 소리치는 아우성이라 하고 싶은데 혹은 개새끼라 욕하는 울근불근 악다구니라 하고 싶은데 이젠 찬 기운 스미는 방문을 열고 거리로 나설 힘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스러질 것인가, 소멸을 준비해야 하는가 가슴에 새긴 바람은 너무나 뚜렷한데, 더욱 뚜렷해지는데 버티고 서 있어야 할 힘은 겨우 ..

한줄 詩 2020.10.05

김 씨의 당부 - 서영택

김 씨의 당부 - 서영택 혼불은 제 몸을 태워서 불꽃을 피는구나 장작을 넣자 불꽃 화르락 일어서다 앉는다 김 씨는 북망산 가려고 저 나무를 베지는 않았을 것 북어처럼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는 했다 김 씨는 이빨 보이고 웃는다 "내 인생 마지막 환하게 살다 가네" 마주 앉은 백구가 꼬리를 흔든다 이름 없이 생을 전전하더니 죽어서도 그냥 김 씨였던 그 영정사진이 걸어와 툭툭 손을 털었다 양은 사발에 막걸리를 따른다 "회포들 풀어, 댕기러 오느라 고맙네 나는 북망산이 세 걸음, 자네들은 열 걸음 산 입에 거미줄 치지 말고 신발이나 잘 챙겨 가게나" *시집/ 돌 속의 울음/ 서정시학 구룡마을 - 서영택 꿈에서 깬 나무들이 감추고 있던 말들을 쏟아낸다 냉장고는 휘파람을 불고 프랫카드가 바닥을 뒹굴고 있다 골목은 이..

한줄 詩 2020.10.05

나이롱 바지와 플라스틱 바구니

예전에 나이롱 바지를 입었던 시절이 있었다. 워낙 개구쟁이여서 툭 하면 바지 무릎이 헤지곤 했는데 나이론 바지는 질겼다. 나이롱 바지가 질긴 반면에 불에 약했다. 불에 슬쩍 닿아도 오그라들거나 구멍이 났다. 지금은 환경 오염의 주범이지만 플라스틱 출현은 인류 문명에 큰 변화를 줬다. 바구니, 바가지, 다라이 등, 플라스틱은 생활용품에도 변혁이었다. 예전에 그 귀한(?) 플라스틱 바구니를 불에 올렸다가 한쪽이 녹아 찌그러졌다. 어머니에게 빗자루로 엄청 맞았다. 없는 집안에 플라스틱 바구니는 큰 살림이었을 터, 바구니 한쪽을 불에 태운 것이다. 깜짝 놀라 녹아 내린 곳을 만졌다가 손가락을 데었다. 어머닌 아들 손가락이 데인 것보다 구멍 나고 찌그러져 못 쓰게 된 바구니가 더 아까웠다. 오래 전 이야기다.

다섯 景 2020.10.04

바람을 품은 사내 - 정덕재

바람을 품은 사내 - 정덕재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급해도 걸음은 옮겨지지 않는다 지금 출발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마음은 떠났어도 다리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어보지만 아직 하나를 시작하지 못했다 거친 사막을 견뎌온 사내 세상을 휘젓던 사내 소주 다섯 병을 마시고 새벽처럼 일어나 바람처럼 달려가던 사내 먼저 떠난 여자가 그리워 밤늦게 울던 사내가 풍 맞았다 바람은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한 번 멈춰선 바람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집/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걷는사람 콩나물국밥을 먹으며 - 정덕재 아침 6시 15분 그쯤이면 새벽인가 콩나물국밥을 기다리는 사내 셋은 깍두기와 김치를 먹으며 사람 얘기를 한다 취기에 오른 남녀 두 ..

한줄 詩 2020.09.29

구절초 - 김재룡

구절초 - 김재룡 어머니는 여섯 살이 된 나를 데리고 개가했다. 양주 남면에서 광적면으로 이십여 리를 들어가는 삿갓봉 외딴 집이었다. 칠 남매의 둘째가 새아버지였다. 여덟 살과 네 살 위 고모 둘, 두 살 위 삼촌, 한 살 밑 고모를 포함해 모두 열 식구가 한 지붕 밑에 살았다. 이따금 밖으로 떠도는 삼촌이 집에 들르곤 했다. 갖가지 들꽃이 흐드러져 있을 때 여동생을 보았다. 이름이 국화였다. 할아버지는 목수였고 아버지는 정미소 일꾼이었다. 밖으로 떠돌다 어쩌다 집에 들어서는 할아버지는 성미가 고약하고 불같았다. 장마철이면 사랑방에서 문틀을 짜면서 지에미부틀이라는 욕을 입에 달았다. 가끔 작은삼촌이 두들겨 맞았다. 없는 살림에 어머니는 할머니를 설득해 두부 장사를 시작했다. 하루걸러 콩을 불려 맷돌에 갈..

한줄 詩 2020.09.29

맨드라미를 위한 사화(詞話) - 황원교

맨드라미를 위한 사화(詞話) - 황원교 꽃도 제 가슴에 생채기를 낼 수 있다 번갯불처럼 눈을 멀게 하는 꽃 천둥처럼 귓전을 울리는 꽃 눈 마주칠 적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텅 빈 늦가을 뜨락을 지키는 저 외로운 파수꾼이 머리에 이고 지고 있는 붉디붉은 생각들도 차가운 밤이슬에 색이 바래 간다 뜬눈으로 밤을 함께 보내고 아침이면 배갯잇에 머리칼 한 움큼씩 묻어나는 생이여 남은 날은 저 앞산 단풍처럼 물들어 갈 때는 선운사 동백꽃처럼 한 치의 미련 없이 낙하할 수 있게 해다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몸통으로 보도블록 틈새에서 꼿꼿이 버티고 서 있는 눈물겨운 저 고집, 내 아버지의 생을 빼닮은 꽃이여 *시집/ 꿈꾸는 중심/ 도서출판 시가 화덕 앞에서 - 황원교 살아가면서 방화범처럼 세상을 죄다 불 싸지..

한줄 詩 2020.09.29

흔들리는 일 - 이서화

흔들리는 일 - 이서화 어금니 근처의 이빨 하나가 점점 더 심하게 흔들린다 어느 절의 당간지주 못지않은 역할의 기둥이었다 섭식과 씹는 일을 받치고 서있던 막중이었지만 푸성귀조차 힘주어 씹지 못하는 것을 두고 그동안 씹어 삼켰던 것을 생각하면 다름 아닌 기둥 하나를 흔든 일 종래에는 온 기둥을 다 뽑는 일이 나를 먹여 살린 일이었다는 것 세상의 물렁물렁한 일 물렁한 음식 앞에서도 이젠 단단히 각오하라는 뜻 마지막 폐업에 몇 숟가락의 쌀을 넣어주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다 더 이상 먹여 살릴 일이나 먹고 살 일이 영영 끝난 뒤에도 생쌀을 오래 물고 있을 기둥 없는 폐업처럼 그래서 속수무책이라는 말을 흔들리는 이빨이 지긋이 깨물어 보는 것이다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 천년의시작 흔들리는 균형 - 이서화 물..

한줄 詩 2020.09.28

단풍이 오는 속도 - 황형철

단풍이 오는 속도 - 황형철 이달 25일 설악산을 출발한 단풍이 광주 무등산에는 다음 달 20일쯤에나 이를 것이라고 한다 백이십 리쯤 될까 자동차로 예닐곱 시간인데 단풍은 부러 산 넘고 물 건너 바위에 앉았다가 구름도 만나고 돌고 돌아 찬찬히 내려온다 너도 단풍처럼 와라 십 리쯤 걷다가 한번 쉬고 또 십 리쯤 걷다가 한번 쉬고 으르렁으르렁 광기의 그것은 냅다 던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툴 것도 없이 기웃거리고 비틀거리고 머뭇도 거려보고 구부정구부정 온몸에 길을 감고 쑥부쟁이와 구절초 감별법도 배워 곰살맞게 말 붙이며 와라 가뿐 산세를 넘는 단풍의 자세도 익히고 물병자리 고래자리 지도 삼아 같은 박동 같은 호흡으로 도처에 흩어진 문장들 나이테처럼 새기며 직립보행으로 와라 단풍도 사람도 매한가지였던 거라 너..

한줄 詩 2020.09.28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 김진호

정치와 종교 얘기는 꺼내기가 늘 조심스럽다. 내 주변에 기독교인이 많기에 더욱 그렇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가능한 종교나 정치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의견이 다르면 대립하다가 결국엔 말싸움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종교인이 가장 편향된 생각을 갖고 있다. 사랑이나 자비를 베풀고 실천한다는 종교의 가르침과는 반대다. 특히 개신교가 그렇다. 어떤 신학대 교수가 종교 화합 차원에서 불교 행사에 참석해 덕담으로 한 말을 트집 잡아 이단으로 몰아 퇴진 시킨 일도 있다. 큰 틀에서 그 사람의 생각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목만 딱 뽑아서 문제 삼은 것이다. 이런 방식이라면 직장에서든 동호회 모임에서든 얼마든지 꼬투리 잡아 불이익을 줄 수 있다. 일상에서도 말꼬리 잡고 늘어질 때 얼마나 사..

네줄 冊 2020.09.27

고등어 - 박미경

고등어 - 박미경 시장으로 걸어갔다 깊은 바다, 좌판 보인다 부부는 마치 깊은 바닷속을 쉼 없이 헤엄치듯 물기를 머금은 고등어와 갈치를 건져 올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웃을 뿐 큰소리로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지도 않았다 돈을 담은 고등어 피 말라붙은 압력밥솥 헐거워진 뚜껑으로 빠져나가려는 소금기 돌려 잠그며 너절한 지난날 뜸 들이는 중이다 고등어를 두 동강 내어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눈을 가려 버렸다 나는 지금 고등어 눈을 뜨고 있지 않을까 움직일 수 없다 사람들이 출렁이며 밀려올 때마다 균형을 잡아주던 지느러미와 낙망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던 꼬리가 내장과 함께 제거되어 수북하다 시장으로 허기를 구걸하러 온 것 같은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이 비루한 시간 어쩜 우리는 서로의 허기를 채워주는 것인지..

한줄 詩 2020.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