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 - 김옥종

마루안 2020. 9. 16. 19:25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 - 김옥종


어제도 너를 보내준 꽃무릇 길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에 한 번씩은
헤어짐을 준비해온 터라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은 없을 거라고
촉촉이 젖어있는 어둠에 볼을 비벼댄다
서로에게 가까이 가는 길은 너무 힘들어
배롱나무 꽃이 져버린 달력을 넘기며
어둑한 밤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 네 지친 그림자를 떠올리면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사방은 어둡고 다다를 수 없는 너는
파도로 살아나
가슴으로만
그 여린 가슴으로만 무너져 내리는데
눈물 한 방울 없이
거칠게 잊어 줄 것 같은 계절에
앞서 떠난 바람이 대숲을 흔들던 날에도
서로 다른 부위의 상처가
누구의 심장에도 박히지 못한 침엽수로 떠돌고 있었으니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시집/ 민어의 노래/ 휴먼앤북스

 

 

 

 

 

 

아욱국 - 김옥종


열무 밭 한쪽에 곁눈질 하던
방울 토마토 두서너 개
동네 어른들 입속으로 돌아가시고

부추 목 베어
간장돼지불고기 양념장에 돌아가시던 날도
이렇듯 너는 푸른 새악시는 아니었다

약 불로 졸이듯 지친 그대를
풋내만 가시게 한소끔 끓여도

가을은 충분히 간지럽고
여전히 네 사랑은 돌아올 시절을
너무 오래 잊고 지내는구나

 

 

 

 

# 김옥종 시인은 1969년 전남 신안의 섬 지도에서 출생했다. 2015년 <시와경계>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민어의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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