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정선 몰운대 - 전영관

마루안 2020. 9. 16. 19:15

 

 

 

정선 몰운대 - 전영관


나무와 사람은 슬픔의 속도가 다를 것

투신할 것도 아니면서
새들의 높이에서 아래를 보면
사랑의 문장이 바람에 흩어지는 것 같아
아프다

나무의 슬픔은
천 갈래로 몸이 갈라지고 뒤틀리면서
백 년 동안 천천히 머무는데
어제의 상실과 몰락 따위를 한탄하였다

벼랑을 움켜쥐고 선 소나무는
몸피를 키우는 일보다
쓰러지지 않으려 뿌리만 더 굵어졌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것들이나 차지하려고 악력을 키웠다
건성으로 타인의 역경을 칭찬하듯
드러난 뿌리들을 감탄하였다
애련(愛戀)을 앓는 이에게 여기를 권하겠다
하늘을 우러르면 슬픔도 흩어질 것
백년 소나무 곁에 앉은 채로 풍장을 치러달라고
바람에게 부탁했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귀신 - 전영관


서로를 찌르는 가시덤불에 꽃을 놓다니
불행을 이겨본 사람이 장미를 육종했을 것이다

전생의 파경을 다 기억한 채로 환생한 여자와
고양이 발톱을 이종교배 한 결과가 이글거린다

눈썹달의 애틋함으로 화장한 여자가
같이 앉은뱅이 되자고 눈짓한다
장미인데 맨드라미를 느끼듯 징그럽다

볼 때마다 눈을 찔리고 심장까지 접질린다
자청한 지옥이라 과장했지만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어 낡아버린 양식이다

멀미 운운하는 반거충이들은
극(極)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다루기 손쉬운 개량종 장미 앞에서
문장의 희귀종을 찾는다

행인들은 서로가 카메라 먼저 들이댄다
장미를 몰라서 제 배경으로 삼는다

습작생은 첫 줄부터 막막해한다
욕심으로 저지르고 후회한다

장미를 알 것 같으니까
결구(結句)에 웅크린 불면부터 두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