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 허연
사랑이 끓어넘치던 어느 시절을 이제는 복원하지 못하지. 그 어떤 불편과 불안도 견디게 하던 육체의 날들을 되살리지 못하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
그래도 약속한 일은 해야 해서
재회라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때맞춰 들어온 햇살에 절반쯤 어두워진 너. 수다스러워진 너. 여전히 내 마음에 포개지던 너.
누가 더 많이 그리워했었지.
오늘의 경건함도 지하철 끊어질 무렵이면 다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서로 들고 왔던 기억. 그것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것이 저주였음을.
재회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아니었음을.
오래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를.
지금 이 진공관 안에서 끝끝내 중심 잡기를.
당신, 가지도 말고 오지도 말 것이며
어디에도 속하지 말기를.
그래서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중심에 관해 - 허연
중심을 잃는다는 것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회전목마가
꿈과 꿈이 아닌 것을 모두 싣고
진공으로 사라진다는 것
중심이 날 떠날 수도 있다는 것
살면서
가장 막막한 일이다
어지러운 병에 걸리고서야
중심이 뭔지 알았다
중심이 흔들리니
시도 혼도 다 흔들리고
그리움도 원망도 다 흔들리고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까지 가는 것도 어렵다
그동안 내게도 중심이 있어서
시소처럼 살았지만
튕겨 나가지 않았었구나
중심을 무시했었다
귀하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웠다
중심이 없어야 한없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알겠다
중심이 있어
날아오르고, 흐르고, 떠날 수 있었던 거구나
*시인의 말
소식은 없었다
밤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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