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 허연

마루안 2020. 9. 9. 19:05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 허연 


사랑이 끓어넘치던 어느 시절을 이제는 복원하지 못하지. 그 어떤 불편과 불안도 견디게 하던 육체의 날들을 되살리지 못하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 
​ 
그래도 약속한 일은 해야 해서 
재회라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 
때맞춰 들어온 햇살에 절반쯤 어두워진 너. 수다스러워진 너. 여전히 내 마음에 포개지던 너. 
​ 
누가 더 많이 그리워했었지. 
오늘의 경건함도 지하철 끊어질 무렵이면 다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서로 들고 왔던 기억. 그것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것이 저주였음을. 
​ 
재회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아니었음을. 
오래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를. 
지금 이 진공관 안에서 끝끝내 중심 잡기를. 
​ 
당신, 가지도 말고 오지도 말 것이며 
어디에도 속하지 말기를. 
그래서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중심에 관해 - 허연 


중심을 잃는다는 것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회전목마가 
꿈과 꿈이 아닌 것을 모두 싣고 
진공으로 사라진다는 것 

중심이 날 떠날 수도 있다는 것 
살면서 
가장 막막한 일이다 

어지러운 병에 걸리고서야 
중심이 뭔지 알았다 

중심이 흔들리니 
시도 혼도 다 흔들리고 
그리움도 원망도 다 흔들리고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까지 가는 것도 어렵다 

그동안 내게도 중심이 있어서 
시소처럼 살았지만 
튕겨 나가지 않았었구나 

중심을 무시했었다 
귀하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웠다 
중심이 없어야 한없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알겠다 
중심이 있어 
날아오르고, 흐르고, 떠날 수 있었던 거구나

 

 

 

 

*시인의 말

소식은 없었다
밤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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