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짧아졌다 - 이강산

마루안 2020. 9. 9. 19:17

 

 

내가 짧아졌다 - 이강산


손에 쥔 것을 풀고 다시 쥔다
쥐는 것의 무게에 끌려 걸음이 빨라진다

이대로 길 끝에 닿을 수 있을지

들여다보면 어제의 내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나는 어느새 나를 다 써버린 듯
그림자조차 짧아졌다

더 가볍거나
더 느리거나

내일도 모레도 반복될
나와 나,

길이 끝날 때까지는
나를 좀 아껴 쓸 일이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풍탁(風鐸) - 이강산


지금까지 채운 것 다 비우고 호수는 물뿐이다
바람의 손끝만 닿아도 심연까지 번지는 저 투명한 공명이라니

강원여인숙 102호실 문밖,
어느 방에선가 여인의 소리도 호수처럼 맑다
만 원짜리 지폐 두 장만으로도 떨리는 저 여인의 풍경이라니

세상의 호수와 여인숙을 건너 가까스로 이순의 추녀에 매달린 나는
아직 숨소리조차 둔탁한 쇠뭉치

역마의 속병이 도지는 어느 땐가 뼛속까지 가벼워지겠지만
지금은 한 점 소리가 목마른 때,

탁란처럼 나를 두들겨줄 바람이여


 

 

# 이강산 시인은 1959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 <모항母港>, <하모니카를 찾아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