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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주의보 - 전영관

한파주의보 - 전영관 지금 3월을 생각한다는 것은 미리 달려가 권태라는 벌을 받는 일 등마다 서릿발 무늬를 짊어진 겨울의 유민이 되어 봄 제국 앞에 입국심사를 기다려야 한다 동창의 불행을 소문내는 척 애틋하게 혹한을 설명하는 기상 캐스터의 짧은 원피스에서 이물감이 올라온다 불 꺼진 난로라도 보는 순간 손부터 꺼내는 습관을 잊을 때쯤 3월이 스민다 혼음하듯 외투에 매달린 악취들에서 번다함을 느낀다 한쪽으로 닳은 뒤축에서 생계의 편벽(便辟)을 동정한다 지난 달력의 기념일들을 옮기다가 꽃 따위에 대한 기대도 없이 3월에서 멈췄다 그날들을 더이상 표기하지 않을 때 소멸을 생각한다 버스에 탑승한 이상 언젠가는 하차해야만 한다 쌓아놓았던 나이를 다 뜯어먹은 노인마냥 폐허를 경유한 사람은 수긍의 기술을 안다 노숙인의..

한줄 詩 2021.02.04

이러다 지구에 플라스틱만 남겠어 - 강신호

내 삶을 반성하게 하는 좋은 책을 읽었다. 나름 기후 변화를 걱정하며 환경 운동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각성하게 되었다. 이런 책은 외국책을 번역한 것이 많은데 강신호 선생이 참 좋은 책을 썼다. 몇 군데 화학 용어 때문에 전문적 지식이 필요할 것 같지만 어렵지 않게 읽혔다. 플라스틱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연구 덕이다. 어떻게 플라스틱이 활용되었고 그 결과 넘쳐나는 프라스틱 공해를 벗어나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누구나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 오염을 알고 있으나 줄이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제부터라도 플라스틱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 플라스틱 재활용이 어려운지 왜 태우면 안 되는지 왜 자연에 버리면 안 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결론은 누군가 ..

네줄 冊 2021.02.03

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 백인덕

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 백인덕 담장 밖에서 밖으로만 그림자를 늘이는 나무는 안다. 몇 차례 돌팔매쯤 거뜬히 견디는 키 작은 관목조차 알고 있다. 시간은 철갑(鐵甲)을 둘러주거나 석회질 외투로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아님을. 밀어내는 힘과 억누르는 세상이 만났을 때 축축하고 질긴 외피로 자기 한계를 그을 때 금은 이내 상처가 되고 상처는 강이 되어 모든 뜻밖의 저녁 아래로 흐를 뿐이란 걸 시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온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문학의전당 뼈아픈 근황 - 백인덕 서 있는 내내 번갈아 저리는 다리 두 눈 꼭 감고도 추억 하나에 집중하지 못해 무작정 내린 낯선 지명의 구도심 지하에도 지상에도 즐비한 곡(哭)소리 자진폐업, 임대문의, 점포정리, 핵폭탄세일의 반투명 유리벽을 유람하는데 순간 눈..

한줄 詩 2021.02.03

엄마는 그때 어디 있었어 - 피재현

엄마는 그때 어디 있었어 - 피재현 할머니가 나를 키워 줬어 두 주 전에 할머니를 잃은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누가 키웠나 자두나무 아래 상자를 놓고 올라서 붉은 자두를 향해 손을 뻗을 때 할머니는 내 손을 때렸지 엄마는 집에 없었지 나는 누가 이렇게 늙도록 키웠나 언 강에, 강물에, 바람에 지독하게 맵던 바람이라니 할머니는 봄바람이 귀찮다며 그만 죽어 버렸지 열아홉의 나는 봄바람처럼 울면서 국밥을 날랐지만 문상 온 친구들은 절도 잘 할 줄 몰랐어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나는 눈물을 훔치고 내일이 발인이야 우린 선산이 있어 제법 상례를 아는 체했지만 할머니가 나를 키워 주었어, 라고 말하지 않았어 문어를 더 달라는 친구를 힐끗 보았어 경멸과 연민의 짝짝이 눈으로 도대체 나는 누가 키웠나 키운 사..

한줄 詩 2021.02.03

밥솥 - 이강산

밥솥 - 이강산 모옥(茅屋) 한 채, 넷째 아들로 입양한 토끼의 생일 선물이다 두 살배기 토끼의 등 따스운 아랫목이고 밥솥이다 밥맛 좋은 날엔 슬금슬금 몇 숟가락 더 퍼먹고 밥솥 중턱에 유리창을 낸다 -밥솥에 숟가락 대지 마라 어머니의 금기를 어긴 나의 일탈을 엿본 게 분명하다 숟가락 자국을 지우기 위해 밥을 흩어놓는 모양도 나를 빼박았다 토끼보다 먼저 입양한 동쪽 호수, 가뭄 끝에 가까스로 물밥 지어낸 호수의 밥솥을 들여다보자면 금복주 병이며 낡은 군화의 흉터가 선명하다 십중팔구 식탐 강한 막내가 어머니 몰래 퍼먹은 숟가락 자국일 터, 그러나 밥맛이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금기를 깨뜨릴 수 있다면 나는 세상의 모든 밥솥을 열어보고 싶지만 밥솥이 없는 경우, 예컨데 청량리 588의 유리창에 호수처럼 고여있는..

한줄 詩 2021.02.03

그 달빛 아득했느니 - 김재룡

그 달빛 아득했느니 - 김재룡 남서능 끄트머리에서 시작하여 겨우 동북 주능으로 붙었을 때 이미 거리를 잴 수 없는 어둠의 저편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한 발자국 앞의 침침한 시선마저도 불연속적인 새소리와 함께 푸득인다 허기와 함께 달라붙는 거친 어둠의 숨소리 끝없이 달빛을 밀어내며 달빛이 질 때까지 또 다른 어둠에 접목되는 산 그의 허리 갑자기 움틀거리는 본능 어떤 짐승이 능선을 타거나 상봉에서 상상봉으로 오르는가 인간 아닌 어떤 짐승이 이 산의 정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는가 피투성이로 절룩이며 끌고 온 쫓기는 꿈을 계산 없이 드러내는가 뻘뻘거리며 원시림을 뚫고 나오다 문득 마주치던 몇 기의 돌무덤 산맥을 끌고 가는 별무리 부서지는 달빛 따라 꿈길처럼 이어지는 야간 산행의 한복판 이 산의 정상에..

한줄 詩 2021.02.02

이 땅의 시시포스 - 정기복

이 땅의 시시포스 - 정기복 시시포스가 신의 형벌이라면 이 땅의 택시 노동자는 소자본의 형벌이다 무너진 중산층의 가장 퇴출당한 지식 노동자 전문 기술을 익히지 못한 노동자가 쉽게 선택했다가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바퀴의 형벌이다 우리의 노동은 팔과 다리만을 사용하는 단순노동인 듯하나 긴장의 연속으로 뇌세포를 지워나가고 무릎도가니를 깎아내고 망막을 혹사시켜 시력을 잃어가는 하루 12시간, 주당 72시간, 한 달 만근 26일로 닳아가는 시간의 형벌이다 우리의 바퀴는 일 년이면 78,000km 지구 두 바퀴를 도는 긴 여정이나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였고 지구 세 바퀴씩 십 년을 돈다 하여도 요원한 휴식과 안식의 뺑뺑이인지 모른다 문명과 문명을 시공간으로 잇는 바퀴의 역할과 운명을 믿어 의심치 않으나 이 땅의 바..

한줄 詩 2021.02.02

계관(鷄冠) - 김유석

계관(鷄冠) - 김유석 새장에 갇힌 새는 얼마쯤 시간이 흘러야 나는 법을 잊게 될까 새장의 새는 한동안 파닥거린다. 갇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창공과 새장은 공간의 차이 공간의 차이를 안과 밖의 문제로 바꾸는 것은 먹이 새의 깃과 새의 높이와 날아가는 방향이 깃든 먹이가 새장을 길들인다. 갇혔음을 알고도 새는 이따금 파닥거린다. 먹이를 찾는 습관이다. 가장 빠르게 창공을 버리고 귀화한 조류는 날지도 못하면서 푸드득거리는 종들 봉황의 볏을 달고도 날지 못하는 닭은 몸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기억을 잊어버린 까닭이다. 밖으로 날아간 새는 또 얼마큼 지나야 갇혔던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도서출판 상상인 유월 - 김유석 ​ 보리밥나무 열매 속으로 붉음이 스며든다. 붉음은 유..

한줄 詩 2021.02.02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 오찬호

사회학자 오찬호의 책은 몇 권 읽었으나 후기를 쓰는 건 처음이다. 노량진 고시촌의 현상을 말하거나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시대의 암울함을 지적하는 책은 참 많이도 공감이 갔다. 그의 책은 읽고 나면 씁쓸하지만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모두들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어 하지만 꼭 짚고 넘어갈 대목을 지적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책이 읽으면 불편하다고 했다. 이 책에도 부제목으로 그걸 언급하고 있는데 나는 그래서 그의 글이 좋다. 구구절절 공감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줄이거나 짧은 걸 좋아해서인지 잠깐만 한눈 팔다 돌아오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 수두룩하다. 초성체로만 된 문장이나 줄임말의 뜻을 알기 위해 한글 공부를 새로 해야 할 판이다. 요즘의 SNS는 짧고 달달한 글이 유행이다. 그런 시대에 오찬..

네줄 冊 2021.02.02

만날 수 없는 사람 - 유병록

만날 수 없는 사람 - 유병록 만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미워하므로 사과한다고 받아줄 마음도 없지만 그들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고 그러니 우리 부디 살아서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혼자 다짐하다가 만나고 싶은데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연락을 하면 전화를 받지 않거나 언제 한번 보자는 이야기만 하고 감감무소식 어쩌면 그들에게는 지독하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나일 수 있겠구나 내가 그동안 지은 죄를 떠올려본다 우리 부디 살아서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나는 사과하지 않았고 사과한다 해도 받다줄 리 없으니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눈 오는 날의 결심 - 유병록 눈이 내린다 차갑고 포근하게 세상을 덮는다 누구든 용서할 수 있다면 아무도 죄를..

한줄 詩 2021.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