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만날 수 없는 사람 - 유병록

마루안 2021. 1. 30. 21:35

 

 

만날 수 없는 사람 - 유병록


만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미워하므로
사과한다고 받아줄 마음도 없지만
그들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고

그러니 우리
부디 살아서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혼자 다짐하다가

만나고 싶은데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연락을 하면
전화를 받지 않거나
언제 한번 보자는 이야기만 하고
감감무소식

어쩌면
그들에게는 지독하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나일 수 있겠구나

내가 그동안 지은 죄를 떠올려본다

우리
부디 살아서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나는 사과하지 않았고
사과한다 해도 받다줄 리 없으니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눈 오는 날의 결심 - 유병록


눈이 내린다
차갑고 포근하게 세상을 덮는다

누구든 용서할 수 있다면
아무도 죄를 묻지 않는다면
이런 밤이리라

말하는 것만으로도 얼마쯤 용서받는 기분이 드니까
눈밭에 나가
용서받지 못한 일을 늘어놓고 싶다

그동안의 잘못을 차곡차곡 써둔다면
푸른 싹이 돋을 때쯤
죄책감도 다 녹아 사라질까

나를 용서할 사람이 더이상 세상에 없는 잘못은
무릎이라도 꿇고 뉘우쳐야겠지
그럼 좀 나아지겠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조금은 가뿐한 마음으로 걸어다니고 싶다

눈 내리는 날
그리하여 순백의 마음을 간직하는 날
죄도 용서받을 것만 같은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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