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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노동을 위하여 - 황세원

코로나 직격탄으로 소득이 준 사람이 여럿인 세상이다. 안 그래도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가 가장 불황이고 살기 어렵다고 하는데 정말 징글징글한 바이러스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나는 비교적 선방이다. 소득이 약간 줄긴 했어도 돈 쓸 일이 줄어든 탓에 소득 감소를 못 느낀다. 길을 가다 보면 사은품 가방을 든 아줌마들이 투자설명회 장소를 안내할 때가 있다. 공짜 좋아하다 코 꿰기 싫어 사양하고 지나치지만 길 가 작은 탁자에 놓인 일회용 물티슈가 붙은 전단지를 집어 온 적은 있다. 오피스텔이 들어서는데 수익이 쏠쏠한 투자처란다. 삐딱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 수익이 좋은 알짜 투자라면 모르는 사람에게 권할 게 아니라 형제자매나 친지들에게 권하지 일면식도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기회를 주냐는 거다. ..

네줄 冊 2021.02.17

Chopin - Funeral March

# 그 분의 삶을 존경해서 가슴 속에 담고 있었던 분이 세상을 떠났다. 날마다 축복 받은 새날이라 여기며 살기에 애도는 짧아도 깊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장례식이 끝나면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마음이 울적해서 어제 오늘 틈 날 때마다 이곡을 들었다. 피아노의 거장 이스트반 체켈리(Istvan Szekely)의 연주다. 1960년에 태어난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다. 그가 연주한 명반들이 즐비하나 나는 오래전에 연주한 이곡이 가장 좋다.

두줄 音 2021.02.17

시간을 굽다 - 이강산

시간을 굽다 - 이강산 속병 덕분에 방 한 칸 얻어 떠나와 맵고 짠 욕망과 인연은 그만 끓이겠다며 잠근 불판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깜박 침묵의 이불에 눕다 깨어보니 두 시 반이 아홉 시 반으로 익어버렸다 낮이 까맣게 타버렸다 방 가득, 공복의 마음 가득 시간의 누룽지 냄새가 매캐하다 타다 만 모퉁이 시간을 마저 굽고 긁어낸 누룽지가 지장암 석탑이다 백 년쯤 홀로 견딜 만하겠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멍게의 방 - 이강산 -살아있는 멍게 있습니다 4차선 횡단보도 곁, 깡마른 멍게 장수 사내의 목소리가 금방 구워낸 고구마 속처럼 뜨겁다 우수(雨水)의 밤이 염천이다 남도에서 예까지 맨발로 걸어온 듯 저 붉은 발가락들, 상처들, 모닥불처럼 끌어안고 견디는 객지의 하룻밤 저 횡단보도란 살아있는 호..

한줄 詩 2021.02.17

사이 - 박구경

사이 - 박구경 들판 이쪽 저쪽으로 미루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잦은 기침으로 이파리 한두 개를 떨구며 겨우 서 있다 곧 거칠고 쓸쓸한 저녁 해가 곰골 뒤로 스러지고 말 것이다 지난 겨울 눈이 어깨에 쌓인 밤 눈썹에 쌓인 밤 떡국을 사러 나선 길에 치매로 세상을 마쳤다는 길갖집 소식을 듣고 전봇대처럼 박혀버린 들판 저쪽에서 새까만 철골 몇 개가 바람 소리를 치며 떨고 있다 철골 위에 눈썹이 앉아 있다 날개를 펴다 만 새 한마리가 앉아 있다 느닺없는 슬픔으로 오히려 내가 불쌍해지는 들판이다 *시집/ 외딴 저 집은 둥글다/ 실천문학사 도시락 - 박구경 이 눈물의 도시락을 간곡하게도 전언이니 다시 전하기를 납작 엎드린 길 너머론 구름이 어지럽게 흘러가고 바람은 멈추어 시커먼 나무 그림자 속에 있었다고 한다 ..

한줄 詩 2021.02.17

내면에 든다 - 허림

내면에 든다 - 허림 삼 년 전쯤인가 카드 돌려막기로 한 달 한 달 근근이 살아내고 있을 때 그 밑돌 빼는 일마저 막히고 셋방 빼달라는 통첩을 들었을 때 내면에 사는 그에게 문자 넣은 적 있다 그 말이 옹이졌는지 내 창고 지으려는 터에 오막 지으면 들어와 살래나? 묻길래 물론이지 여부가 있나 그 후, 생의 오막에 드는 날이면 개똥벌레 날아 길이 환했다 *시집/ 엄마 냄새/ 달아실 첩첩 - 허림 내면이라는 곳은 내면일 뿐 광원이나 명지리 달둔 월둔 살둔 사월평 원당 일어서기 같은 이름들과 큰한이 작은한이 경천 문암 절에 가덕 같은 골짜기에도 바람은 불어오고 눈이 내렸다 하면 한 길씩 빠져 꺽지나 텡가리처럼 터살이 하는 곳 살다보면 대추나무 연실 걸 듯 서로 사는 집들이며 얼굴이며 말씨며 말투도 닮고 입맛까..

한줄 詩 2021.02.16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 - 조수경

작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드디어 읽었다. 집콕을 한 설날 연휴 덕이다. 소설을 거의 안 읽는 편인데도 이 소설은 발간 소식을 듣고 바로 목록에 올렸다. 소제가 조력자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부터 안락사를 적극 지지한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느낄 수 없을 때 안락사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서우는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 학교를 자퇴하고 방안에 갖혀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말문을 닫아 버렸는데 오직 엄마와만 최소한의 소통을 한다. 그것도 휴대폰 문자로만이다. 아버지도 자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더욱 방안에서 나오기를 거부한다. 그가 매일 탐색하는 일은 어떻게 죽을까이다. 드디어 한국에도 죽음을 도와주는 센터가 생겼다. 이제는 안락사를 원해 스위스까지 ..

네줄 冊 2021.02.16

슬픔의 알고리즘 - 정이경

슬픔의 알고리즘 - 정이경 여러 날 집을 비운 적 있다 하루에 한 번은 짧은 햇살이 작은 창에 머물고 바람이 몇 차례 드나들기도 했을 테지만 자른 무를 담아 두었던 주방 창문턱 유리그릇 물은 바싹 말랐고 보라색 무꽃을 피워낸 꽃대의 목은 꺾여 있었다 인기척 없는 집에서 어쩌면 스스로 사물이 되기로 하였는진 모르나 한동안은 혼자서라도 오롯이 살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생명이라는 그 가녀린 목숨을 붙들고 오래 아팠던,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남동생이 하늘로 갔다는 지인이 전한 부음 남은 가족들이 '있고, 없고'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과 함께 떨어져 살지만 건강한 나의 남동생이 오버랩되면서 수척해진 낯빛의 그녀를 미안하게 껴안는다 술잔들이 비워지고 식사를 끝내는 사이에도 어깨며 등 전체가 흐느끼는 장례식장 ..

한줄 詩 2021.02.16

나의 장례식에 가서 - 이병률

나의 장례식에 가서 - 이병률 싸늘한 표정 없이 최대한 웃으려고 마음을 먹으며 나는 내 장례식장에 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보 위에 머리카락이 보여 쓰다듬듯 떼어내려는데 반투명의 비닐 테이블보 밑에 겹쳐서 깔아놓은 다른 테이블보에 들어 있는 머리카락, 차려진 음식 접시들을 이동시키고 테이블보를 살짝 들어 걷어내자니 하필 머리카락이 상 정중앙에 있다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다 내린 다음 테이블보를 벗겨낼 수도 없고 접시로 그것을 가려놓자니 다음 자리를 생각하면 치워야 할 것 같고 돌에 돌이 박혀 있는 형국이다 내가 자리를 떠난 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괜찮지 않은 그것 나는 나에게 문상 가서 남의 머리카락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 나는 살아 있을 때 검은색 위에 붙은 검은 머리카락..

한줄 詩 2021.02.16

밤기차 타는 새벽 - 정기복

밤기차 타는 새벽 - 정기복 문풍지가 부엉이 흉내를 냈다 초생달 젖은 장독대 정한수에는 합장한 주름이 서늘한 별빛 함께 담겼다 울타리 넘어온 바람이 육 남매를 흩어놓고 막내는 밤기차 타기 위해 시오리를 꿴다 아버지, 탄광에서 얻은 허릿병 끌고 산비탈 진흙밭 평생 팔아 사들였다 고구마 빨갛게 캐어낸 가을 한숨 섞인 소원, 삼베옷 칡넝쿨로 동여맨 채 봉긋한 밭언덕이 되셨다 살내음, 땀내음, 삭인 향내 그윽히 소울음 기적이 흔들어놓은 마당을 한 바퀴 돌아 사발의 기포로 달아붙는데, 이제 그 어떤 세월의 한기가 정한수 가득 담길까 옷깃 여미며 걷는 바람 찬 이 새벽에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어떤 청혼 - 정기복 바다 쉴새없이 뒤척여 가슴에 묻었던 사람 하나 십 년 부대껴 떠나보내고 달무리 속 대보름달 ..

한줄 詩 2021.02.16

한 남자 - 히라노 게이치로

사랑했던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둘 다 재혼이라는 것을 알고 결혼 생활을 했지만 남편이 생전에 고백했던 자신의 과거는 완전 가짜였다. 이혼 후 고향 부모님 집으로 내려 온 는 라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자식까지 낳고 살던 4년 간의 행복도 잠시, 다정하고 성실했던 남자가 사고로 죽는다. 남편의 가족에게 연락을 하자 모르는 사람이란다. 세상에,, 사랑했던 남편이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았던 가짜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리에는 예전에 이혼 할 때 도움을 줬던 변호사 에게 남편의 과거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소설은 이제부터 기도의 발길을 따라 탐정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영화를 보고 감명이 깊으면 감독의 과거 작품을 찾게 되듯 소설도 마찬가지다. 는 한국에도..

네줄 冊 2021.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