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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대교 - 손석호

마포대교 - 손석호 추락하는 게 질문 많은 내게 대답하는 것 같아 망설이는 오후가 수면에 발자국을 내는 동안 호주머니 속 출렁이는 우울 흐릿해지고 싶어 눈물 커튼을 펼쳐도 고드름처럼 자라나 찌르는 햇살 건너도 또 다른 건너편이 지켜보고 있고 지금이 어제 읽은 일기 같아 돌아보면 내게 둘러져 있던 내가 잃어버린 목도리처럼 말없이 내 몸을 벗어나 있어 내려다보는 즐거운 통증 내게는 난간이 없다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파란출판 우화(羽化) - 손석호 한 번도 날아 보지 못했던 당신, 앰뷸런스가 모시나비처럼 오르락내리락 고개를 돌아 나가고 유서를 대신하는 냄새가 문밖으로 빠져나온다 명치끝을 꾹꾹 눌렀던 천정의 형광등이 오랜 용화(蛹化)의 얼룩을 내려다본다 기다림의 등이 휜 것처럼 출입문 쪽을 응시한 머리 ..

한줄 詩 2021.02.15

플랫이 붙은 어느 노동자의 악보 - 조우연

플랫이 붙은 어느 노동자의 악보 - 조우연 그의 악보엔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명쾌하게 그를 연주해줄 바이올린 같은 여자도, 스타카토로 패배를 튕겨줄 아이도 없이 그는 지금 공사장 옆 전주콩나물국밥집에 혼자 앉아 저녁을 먹고 있다 뚝배기에 악보를 구겨 넣고 휘휘 젓는다 엉긴 노란 음표들이 고음으로 끓었다가 반음으로 가라앉는다. 좌로 좌로 반음씩 내려가다 보면 불 꺼진 그의 반지하 빈방이 나온다 기울어진 그의 음계는 단조롭기 짝이 없다 단조롭다는 것, 그 음울한 G단조의 반복 낡은 현악기처럼 구부러진 어깨 너머로 소주 한 병이 반주되고 있다 대가리가 두 쪽 난 사분음표 두어 개 얼마 전 추락한 십년지기는 덥다고 안전모를 쓰지 않았다 사는 데에는 따로 주법이 없다는 위안으로 막잔을 비운다 그는 조금 알레그..

한줄 詩 2021.02.15

왜행성 - 김태형

왜행성 - 김태형 먼 하늘을 올려다보니 심장 한 쪽이 무너지고 있는 게 보인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아직 한 쪽의 심장이 남아 있다 남은 심장 한 쪽으로 돌이킬 것인가 그 힘으로 얼음덩어리와 운석들이 가득한 곳으로 저 암흑까지 조금 더 가 볼 것인가 선명하고 밝은 심장 한 쪽이 거대한 운석의 충돌 때문에 생긴 것이라니 남은 한 쪽의 심장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했지만 정작 사라진 사람은 나였다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나는 한동안 보이지 않는 것을 지키려고 보이지 않아야만 했다 남은 심장 한 쪽에 얼어붙은 대평원이 없었다면 한 쪽의 심장마저 잃고야 말았을 것이다 궤도를 끊고서 떠돌다가 먼지가 되거나 파편이 되어 다시 돌이키려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영원토록 어둠이 되었을지 모른..

한줄 詩 2021.02.15

언약, 아름다웠다 - 김윤배 시집

뒤늦게 김윤배 시인의 시에 푹 빠졌다. 시인은 해방 되기 전인 1944년에 태어났으니 원로 시인 중에도 맏형 격이다. 2년 전에 시집을 냈는데 이번에 새로운 시집 가 현대시학에서 나왔다. 등단 40년이 다 되어 가는 김윤배 시인은 이번이 몇 번째 시집일까. 세어 보지는 않았으나 열 권은 넘고 스무 권은 안 된다. 나는 김윤배 시집을 몇 권이나 읽었을까. 다섯 권은 넘고 열 권은 안 된다. 그전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몇 년전부터 이 사람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착하게 살아 온 인생과 곱게 늙은 노년을 느낄 수 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엄마 젖을 빨다 밥을 먹었으나 그 시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속담 의미와 상관 없이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

네줄 冊 2021.02.10

시간의 정오(正誤) - 전형철

시간의 정오(正誤) - 전형철 -종로 3가 오랜만이다 별을 문진하느라 5분쯤 늦을 것 같아 소설의 지문 같은 말 자주 이름이 보이더라 오늘 달과 화성과 금성이 직렬한대 우리가 모일 수 있는 최적의 편성표겠지 다리를 묶어두거나 의자를 좀 당겨 앉아 4년마다 1초쯤 느려지거나 빨라지겠지 이런 날엔 눈은 주머니에 넣어 두고 집을 비우는 거야 울타리에 묶인 종은 하루만 울고 네 번째 간빙기에는 붉은 심장을 문밖에 쌓아두고 다음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불러 보는 거야 땅속 길이 너무 뜨거워 막차는 주말에 달라지겠지 지구가 멸망하면 인사하자 너는 누구의 행성이니, 우리는 누구의 얼굴이니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출판 건강검진 - 전형철 올 것이 왔다 약속을 미루고 몇 번이나 퇴짜를 놓았지만 시민은 곧 용병, ..

한줄 詩 2021.02.10

트럭의 우울 - 고광식

트럭의 우울 - 고광식 ​ 폭설을 맞으며 폐업을 하는 피자집 상처를 긁어내기 위해 트럭이 2.5톤 짐칸을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이민다 피자 굽는 냄새에 행복하게 웃음 짓던 아이들의 표정을 짐칸에 싣고 나면 슬픔은 손으로 두드려 만든 피자처럼 쫄깃해진다 시린 눈송이는 환하게 불 켜진 철거 현장으로 문득 멈춰 서서 내린다 피자의 맛마저 떠올릴 수 없이 구겨진 차림표가 아무렇게나 부서진 벽돌과 함께 짐칸에 실리면 개업식 때 이벤트로 쏘아 올린 음악 소리만 쾅쾅 짐칸을 홀로 울린다 띁어낼수록 더 허기가 지는 가게 안 실내장식 소품들이 부러진 갈비뼈 드러낸다 하나씩 비워 감으로써 상처 난 살에 새살이 돋는 걸까 논고개로 택지 개발 지역 버스 정류장 앞 인도로 머리만 내놓은 트럭에 실리는 탁자와 의자가 쭉정이처럼 ..

한줄 詩 2021.02.10

잠 - 박윤우

잠 - 박윤우 2,500원,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창가 의자가 공짜 구름의 힘을 구경하는 것도 공짜, 눈 뜨고 조는 것도 공짜다 엄마는 나를 뱃속에 채우고 아홉 달 반을 뭉쳤다했다 덜 뭉친 나를 꺼내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동티나지마라! 느티나무에게 물 떠놓고 빌었다고 정한수와 수수팥떡의 효능일까 리필 받은 아메리카노가 묽어서일까 앉으면 존다 기다리는 너는 오지 않고 건너 유리창에 비치는 저 남자는 잠 좀 아는 남자, 막무가내 잠의 손잡이를 세 시간 째 움키고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VOD스크린 한 편의 영화에는 몇 번의 키스신이 들어갈 수 있나? 몇 사람이 죽어나가야 끝이 나나? 키스타임은 이미 끝이 났고 죽을 사람 다 죽었는데 여태 의자를 업은 채 조는 남자 이런! 내가 저 남자였다니 입지 않을..

한줄 詩 2021.02.10

뜨거운 포옹 - 김태완

뜨거운 포옹 - 김태완 눈발 휘몰아치는 겨울 한복판 기차역 대합실에 몸을 실었다 웅성거리는 대합실 눈발처럼 부산한 사람들 어디를 가야 할 사람들 어디서 오는 사람들 틈 사이로 꾸부정하게 들어오는 냉기 잘 들리지 않는 뉴스를 보는 사람들 무표정한 자막처럼 흘러가는 긴 꼬리의 하행선 기차가 덜그럭거리며 역무원의 깃발과 멀어질 때 두리번거리며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들 코트에 떨어진 눈을 털며 들어오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며 연착된 시간을 향해 투덜거리는 젊은 여자의 힐 소리 마술 지팡이가 되어 주문을 걸고 소원을 말하고 싶은 겨울 한 복판 날리는 눈발들 기다림의 시간은 겨울과 닮아 차고 냉정한 여자의 짙은 화장, 가려진 표정 피하고 싶은 겨울 눈발처럼 접고 접어서 날린 공연한 옛 추억에 모두가 잠시 우수에 젖고 ..

한줄 詩 2021.02.09

이것은 재난영화가 아니다 - 손남숙

이것은 재난영화가 아니다 - 손남숙 미세한 먼지에 속박당하고 미세하게 삶이 균열되는 시절에 이르렀다 거룩한 공장이 우리의 즐거움을 가공할 때도 있었으나 토양은 더럽혀지고 숲은 은밀했던 보물을 피로 물들인다 걸음은 활기찼고 아름다운 아기는 계속 태어났다 힘찬 도약을 맹세하는 건물들이 위풍당당하게 풍경을 압도한다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던 남자는 누군가 목을 잡고 흔드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일을 경험한다 폐지 줍던 노인들이 사라진다 소녀들은 입마개를 하고 임산부는 외출하지 않는다 24시간 뉴스에서는 오늘의 날씨와 미세한 배후에 대응하는 자세를 알려 준다 먼지로 덮인 생활의 참사들, 달라질 장소들, 죽어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사가 준비된다 오직 자연만이 먼지의 지옥을 걷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대지에 늘어뜨려..

한줄 詩 2021.02.09

화장 - 류성훈

화장 - 류성훈 헐벗은 어깨 위로 아낌없이 쏟아지는 건 저녁뿐 너는 깨진 이빨과 소용없는 소리들만 천천히 줍는다 이제 좀 쉬어, 어제의 운세만큼 어긋난 목덜미를 밀어 올리는, 집어넣을 것 없는 신발을 신는 그런 휴식 수고 많았고 오늘도 못 받았고 더 보내 줄 것 없는 언덕이 송전탑까기 걸어오면서 녹은 쇠에서 피어나고 그곳에서 너는 쇳물을 마실 거야 그러나 수저는 놓지 말라던 비틀어진 네가 아직도 네 이전의 무게를 불안하게 받치고 있는 날, 여긴 그만 와, 잠들고 싶은 공원의 눈앞에선 네가 세운 철근도 깨끗해 보여서 먼지바람 속에서 내년만 빛나던 라면 봉지를 보았을 때 나무젓가락이 잘못 부러졌을 때 어색한 말을 어디로도 놀리지 못하던 저녁 단단해진 네가 더 어색하게 서 있다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

한줄 詩 2021.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