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생몰연대를 적다 - 안채영

생몰연대를 적다 - 안채영 뒤따라오는 운구차가 백미러 속으로 따라온다 사인(死因)으로 반사된 아침 해가 한동안 같이 따라왔다 사거리를 따라오고 다리를 건너오고 휘어진 길에서 잠시 투명한 반사를 벋어나자 이내 다시 나타나며 따라오는 운구차 화장장 표지판이 나타나고 당신이 지금부터 지나갈 자리는 이젠 불길이라고 붉은 아침 해 속으로 휩싸인다. 보자기에 싸인 따뜻한 우주를 들고 보면 진화가 멈춘, 진공 행성 공기를 다 뺀 유골함은 지지부진했던 하나의 우주다 물이었다가 불이었다가 작은 바람에도 날릴 것이지만 납골장 안 칸칸을 채우고 있는 둥근 행성들은 제각각 다른 생몰연대를 갖고 있다 그깟 우주 쯤 흐려지는 일은 빈번하고 사람들은 모두 무표정한 표정으로 둥둥 떠 있다 떨어진 혀들은 여전히 밀봉해두기로 한다 평생..

한줄 詩 2021.01.22

얼음은 칼날을 물고 사라지고 - 박승민

얼음은 칼날을 물고 사라지고 - 박승민 칼날이 얼음을 문 건지, 얼음이 복부 깊숙이 칼날을 받아 들인건지 알 수 없는, 얼음 속에 박힌 칼날 이 세상, 정말 사랑이라는 체위가 있다면 그렇다면 말이지, 자신이 박은 건지 박힌 것인지조차 모른 채 한생을 한나절처럼 늙어가는 것 무너지는 자기를 무연고 묘지처럼 지나치다가 이제야 생각난 듯 허겁지겁, 그 옛 자리로 돌아가 타들어가던 너의 마음, 이제 알겠다는 듯, 몰라도 알겠다는 듯 천천히, 괴롭게, 천천히, 괴롭게, 고개를 끄덕이듯, 칼날인 듯 얼음인 듯 번들거리는 녹슨 마음을 내 속으로 옮겨 놓는 일 그러나 뼈대의 형식마저 녹아내린 뒤, 둘이 닿았던 기억만이 전부이자 막다른 길목일 때, 누군가 웬 녹슨 물 자국이야! 툭 치고 지나갈 때, 칼날 속에 이미 꽉 ..

한줄 詩 2021.01.22

우선 집부터, 파리의 사회주택 - 최민아

빈익빈 부익부, 슬럼화된 거리, 폭등하는 집값, 떠도는 전세 난민, 쫓겨나는 임차인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집이다. 주거 불안정을 해소한다면 가정과 도시가 바뀌고 나아가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고민해야 하는가. 노동자와 서민의 주거 권리를 떠올리며, 지속 가능한 주택 정책을 만들어 왔는가. 서민을 위한 주택을 짓는 것은 도시의 공공성을 찾는 일이고, 한정된 자원의 땅에 공공성을 부여한다. 함께 사는 사회,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회와 환경을 제공하는 도시를 만드는 것은 노동자를 위한 베르사유궁을 꿈꾸던 이상주의자만의 바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현실의 과제다. 새로 집을 사는 저 많은 사람은 중위값이 9억 원이 넘는 서울의 아파트를 살 재원을 어디서 마련하는 건지..

네줄 冊 2021.01.21

건너가다 - 박병란

건너가다 - 박병란 이른 새벽 부음이었다 목이 말라 부엌 전구를 켠다 거실로 포개지는 표정 없는 빛과 건너편 집에서 새어나오는 말 없는 불빛 제사상에 오르는 식은 산적처럼 핏기가 없다 가기 할 뿐 오지 않는 언덕이 가깝다 오래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은 이제 귀퉁이가 맞게 잘 접어 뒤축 자른 짚신 사이에 끼워둔다 생은 이쪽과 저쪽에 놓인 숟가락처럼 엎어놓고 보면 한순간 무덤이 되어버리는 일 젓가락 한 벌처럼 다정한 오누이를 자처하며 넙죽넙죽 술을 건네는 일 비단 물 한 모금 마시는 것과 물 한 사발 떠놓는 일이 영영 못 보는 일이어서 밖에는 얼음이 얼고 우엉 달인 물 유독 달게 느껴지던 밤 언제 한번 다녀가라던 말은 달이 뜬 쪽으로 고개가 꺾인다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돌아갈 수 없는 데까지 치우치지 않는..

한줄 詩 2021.01.21

가을의 문턱 - 김영희

가을의 문턱 - 김영희 절기는 더위를 땅 밑으로 끌어내렸다 중력의 자장 속으로 들어가는 치솟았던 감정들과 어느덧 지쳐버린 유한한 모양의 요소들 한때는 무한함을 믿기도 했었던 가령, 사랑이나 희망 따위 여름을 벗어놓은 시간은 고적한 것들을 가을의 문턱으로 부른다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이 많아 오히려 쓸쓸해지는 처서를 건너는 저녁 변신과 함께 사라져갈 풍경과, 낯선 노래를 주머니 속에 구겨 넣으며 미리 와 있었던 추억처럼 나는 나를 기다린다 *시집/ 여름 나기를 이야기하는 동안/ 달아실 뒤란 - 김영희 그해 엄마를 태운 꽃가마가 마지막으로 뒤란을 한 바퀴 돌 때 얼굴들은 젖은 뒤축 한 구석을 수런수런 말리고 있었는데, 뇌수를 말리는 맨드라미는 꽃상여에서 떨어진 한 방울 울음이어서 색이 진했다 단 한 번도 드..

한줄 詩 2021.01.21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 최세라 시집

요 근래 좋은 시집 하나를 만나 며칠째 눈이 호강을 했다. 최세라 시집 다. 두 번째 시집에서 제대로 내 마음을 훔쳤다. 지방에서 나온 시집이다. 시집이 안 팔리는 시대에 이런 시집 만나기 쉽지 않다. 많은 것들이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판에 출판계라고 예외가 아니다. 시와반시는 대구에 있는 출판사로 최근 좋은 시집을 꾸준히 내고 있다. 최세라 시집도 모 시인의 시집을 읽고 나서 찾게 되었다. 이런 때는 시집 뒤편에 실린 기존에 나온 시집 목록이 큰 도움이 된다. 행여 지나친 시집은 없는지, 묻혀 있는 시인을 발견해 알아 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최세라 시집이 그랬다. 쏟아지는 시집들 중에서 눈 크게 뜨고 지켜보지 않는 한 놓치기 십상이다. 최세라 시의 특징은 매끄럽게 읽히지는 않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

네줄 冊 2021.01.20

낡은 신발이 남긴 긴 발자국 - 김태완

낡은 신발이 남긴 긴 발자국 - 김태완 가슴 한편 아물지 않는 멍울 같은 것 헛주먹으로 무딘 가슴을 친다고 묵직한 멍울이 떨어지기야 하겠는가 오랫동안 한참을 바라보았지 치열하고 무거운 걸음을 내려놓은 성자의 침묵 고요함이 주는 느린 상처 이제 한 걸음 더 숙연한 길을 향하여 너에게 간다. 낡았다는 것은 너의 소리를 기억한다는 것이지 깊게 더 깊게 너의 안쪽을 향하여 내 슬픔을 욱여넣고 세상의 수많은 질문을 지나왔다는 것이지 지친 걸음을 붙잡고 질긴 집착은 길어지네 가슴 한편 매달려 있던 멍울 한 켤레. *시집/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북인 짝짝이면 어때 - 김태완 짝, 이라는 말은 둘이라는 것 짝짝, 이라고 붙이면 다르다는 것 자세히 보니 내 눈이 짝짝이다 왼쪽과 오른쪽이 다르다 그런데 꼭 짝, 같다 몸..

한줄 詩 2021.01.20

옛집 - 조성순

옛집 - 조성순 살던 집에 가봤네. 사랑은 퇴락하여 반쯤 무너지고 댓돌엔 인적 그쳐 이끼 거뭇하네. 마루 밑엔 녹슨 낫과 호미, 흙이 되어가고 밟으면 우렁차게 소리치며 돌던 네 기상은 어디로 갔나? 허물어진 헛간에 탈곡기 무심히 놓여 있네. 부엌에선 어머니와 아주머니들 고소한 냄새 가득한 음식 장만으로 부산하고 바심하는 마당엔 할아버지 숙부님들 듣기 좋은 웃음꽃 피우고 누이들과 나는 장난질하며 볏단 날랐지. 장대비 오는 여름날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미꾸리가 신기했지. 개구리들이 둥둥 배를 두드리며 마당을 가로지르고 습기 찬 도랑에선 가끔 두꺼비가 나들이 나왔지. 그리운 것들은 다 가시고 들에 있던 개망초, 옆으로 기어가는 바랭이풀 마당을 덮었구나. 눈시울 뜨거워져 발길을 돌리는데 -아들아, 아들아, 돌아오..

한줄 詩 2021.01.20

단추가 느슨해진다 - 이병률

단추가 느슨해진다 - 이병률 ​ 인연이 느슨해져서 꽉 물고 안 놓을 것만 같던 인연이 헐거워져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서 밤길을 걷고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기보다는 집을 나서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 밤길을 걷다 돌고 돌아서도 걷다가 머리를 밀어볼까도 생각하였다 우리는 단추 같은 존재들이기도 할 것이어서 같은 단추들과 나란히 배열을 이루다가도 떨어져 온데간데없이 잃어버리고 마는 단추 같기도 할 것이어서 도무지 헐렁해져서 어느 날 다시 입을 수 없는 벗어놓은 바지 같을 것이다 우리의 어떤 일 같은 것들은 단추가 되어 매달리기도 하고 우리의 아무 일 같은 것이 단추가 되어 느슨히 떨어지기도 하는 그 극명한 절정의 전과 후가 만들어낸 길을 걷다가 그만 실을 밟고 실에 감겨 넘어지면서 밤길을 걸었다 ..

한줄 詩 2021.01.17

하루 - 함명춘

하루 - 함명춘 몸져누운 미래는 여전히 차도가 없고 주식은 깡통이 되고 또 내지 못한 사직서를 가슴에 묻고 돌아오는 길 기분은 착찹해지다가 낙엽처럼 차도 밑으로 한 번 더 떨어지고 납덩어릴 메단 듯 발걸음은 무겁지만 걸을수록 조금씩 내 편에 서서 바람은 불고 풀이 죽은 내 어깨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견장을 달아주며 저만큼 황혼이 어깨동무를 해줄 듯 서있고 모세의 지팡이처럼 내 발걸음 닿을 때마다 붉은 신호등에서 푸른 신호등으로 홍해같이 횡단보도가 활짝 열리는 길 끝에서 문득 뒤돌아보면 나를 위해 박수를 치듯 비둘기 떼 날아오르는, 그래도 흐린 시간보단 한 주먹 쌀만큼이라도 해가 뜬 시간이 더 많았던 하루 그래, 누군가 어디선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시집/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천년의시작 붕..

한줄 詩 2021.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