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나가는 바람 - 이병률

마루안 2020. 11. 2. 21:38

 

 

지나가는 바람 - 이병률


그때 난 인생이라는 말을 몰랐다
인생이라는 말이 싫었다
어른들 중에서도 어른들이나 입에 달고 사는 말이거나
어쩌면 나이들어서나 의미를 갖게 되는 말인 줄로만 알았으며
나는 영원히 그때가 오게 되는 것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 나한테 인생이 찾아왔다
굉장히 큰 배를 타고 와서는
많은 짐들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앞으로는 그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하나 풀어봐야 한다고 했다

좋은 소식 먼저 들려줄까
안 좋은 소식 먼저 전해줄까
언제나처럼 나에게 그렇게만 물어오던 오전 열한시였는데
예고 한 번 없이 여기 구석까지 찾아왔다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사람의 금 - 이병률


많은 청귤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고 몇 바늘을 꿰맸다
나는 평생 살을 꿰맬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극단적으로 금이 갔다

한동안 붕대를 감고 사느라 시원하게 씻지를 못하고
손가락 형편이 나아져 목용탕엘 갔는데
죄다 보이는 건 사람 몸에 난 흉터다

꿰맨 자리
어긋난 부위
몸 한쪽이 움푹 패여 절룩일 수밖에 없는 걸음걸이
그나마 무사한 사람은 그동안의 나였나 싶다

그러나 하반신에 의료용 테이프를 붙이고
목욕하러 들어서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목욕의자에 앉아 떼어내는 테이프 길이만도
족히 사 미터가 되는 걸 곁눈질해서 보았다

태풍에 담이 허물어지면 남의 집 담만 보이고
술에 되게 당한 어느 날 이후에는
술에 취해 길에 앉아 정신 놓는 사람만 보인다
자석 앞의 쇳가루처럼 당겨진다

꿰맨 손가락이 낫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매달리며 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봉합으로 살을 이으려는 것이
쩍 하고 금이 가 벌어진 사람과 사람의 처지를
이어보려는 안간힘하고 뭐가 다르겠나 싶은 것이다

붙지 않는 것들을 참 착실하게도 가려놓고 살고 있다

 



*시인의 말

집이 비어 있으니 며칠 지내다 가세요
바다는 왼쪽 방향이고
슬픔은 집 뒤편에 있습니다
더 머물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나는 그 집에 잠시 머물 다음 사람일 뿐이니

당신은, 그 집에 살다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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