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극야 - 손석호

마루안 2021. 1. 29. 22:27

 

 

극야 - 손석호


태양의 인력에 묶여 있는 지구처럼
돈다, 팔아야 할 하루의 굴레를 굴리며
어제는 지는 해를 당기는 방향으로
오늘은 뜨는 해를 당기는 방향으로
낯선 우리에게 팔목 밴드와 우비를 팔고
익숙한 이웃인 양 건강과 날씨 얘기를 건넨다
때론 서먹하게
내가 내선 순환선일 때 그는 외선 순환선
교차하며 멀어진다
수십억 년 후에야 다시 스칠 행성처럼

자전이 계속되는 동안

밤과 낮 대신 세 번의 지상 구간과 지하 구간이 반복되는 2호선 공전궤도

그의 주름 속에도 오래된 기울기가 있고
견뎌야 할 위도가 높아

표정이 드러나는 지상 구간에선 백야처럼 창백해지고

지하 구간으로 급하강하며 어두워지는 얼굴
아무도 울지 못하게, 먼저

쇠바퀴가 터널에 비명을 지르며 별똥별을 뿌린다

저물어 공전궤도를 이탈하는 자전
어디쯤일까
목을 꺾어 우주에게 물었는데

어제처럼 스피커가 신도림역이라고 알려 준다

문턱을 타 넘는 마찰음

벽지에 그려진 얼룩 별을 흔들어 깨우고

돌던 지구가 멈추고 자전축이 부러진 것처럼
굴레 쓰러진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쪽방 미닫이창

다시는 밝아지지 않을 것처럼 캄캄해진다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파란출판

 

 

 

 

 


줄타기 따방 - 손석호


매달린 세상의 등산 법
내려가는 등산이 있다

바람의 이파리 털어 운세 점치며
발목 묶인 새처럼 스스로 묶인다
내려다보면 자궁 밖 같아서
탯줄처럼 놓지 못하고
종일 휘파람새 흉내 내며 부르는

군데군데 울음 매듭진 트로트풍 노래
밧줄에 꼬인다
허공 딛고 빌딩 안 들여다보며

층층이 스치는 밟지 못한 유년의 계단들
초침처럼 발 뛸 때
어디선가 만났던 사람

닦다가 가볍게 노크하면 창 열어줄 것만 같아서

장력의 만만찮음 견디며 유리 벽에 스스로를 그리는 동안

어느새 노을 뒤따라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덧칠한다

지상은 잠시 시간을 놓는 산장
꽁꽁 묶인 하루 풀어놓고
다시 내려가야 닿을 수 있는 정상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룩으로 눕는다

밤새 노래해도 메아리 없는 반지하방에서
날아오를 내일의 높이 가늠하며
태엽 감는다
산정 팽팽하게 압축되고 있다

 

 

*줄타기 따방: 고층빌딩 유리창 청소 일을 연고 없이 혼자서 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강가에 내리는 눈물 - 이철경  (0) 2021.01.30
상실의 피그말리온 - 김희준  (0) 2021.01.30
피로도시 - 조하은  (0) 2021.01.29
날 테면 날아보게 - 황동규  (0) 2021.01.29
무량한 나날 - 정일남  (0) 2021.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