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피로도시 - 조하은

마루안 2021. 1. 29. 22:18

 

 

피로도시 - 조하은


아침이 열리면 터널을 따라 수없이 돌고 도는 사내들
이 도시에는 넘어야 할 벽도 열어야 할 문도 많다

힘없는 자에게 벽은 벽일 뿐 문이 되지 않는다
벽 앞에서 문을 두드리거나
문 앞에서 벽을 두드리는 자
차갑고 무거운 것들 앞에서 
아침과 저녁은 하나의 사선으로 읽힌다
두들기고 누르고 쥐어짜는 사각의 링에서는
시끄러운 다툼만 널브러져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터널에 갇힌 이들은
이곳으로부터의 탈출만이 꿈이다
손가락 마디만큼 빛의 구멍을 뚫어보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어둠뿐
웅크리고 스러지는 것들은 오늘을 해석할 수 없다

어딘가에 쉴 곳이 있으리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저 걷고 있는 투명인간의 행렬
흔들리는 생의 오타들
따뜻한 햇볕에 닿고 싶은 바람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한 사내가 아홉 명의 가족을 끌고
모래바람 부는 사막을 지나는 중이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문래동 골목 - 조하은


쇳소리 사이사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골목
붉은 쇳물을 부으며 자식들을 길러낸 김씨의 생은
아직도 매질과 담금질 속에서 미로처럼 어지럽다

색 바랜 간판들이 하품하는 사이
은밀하게 알파벳 이름의 간판이 걸리고
전신주 사이로 높은 벽이 소리 없이 올라간다

떠난 사람이나 남아 있는 사람이나
스며드는 낯선 물결에 뒤척임이 많아지는 밤
기계 소리와 스테이크 굽는 냄새가 뒤섞여
오래된 담벼락을 뱅뱅 돌고 있다

장사가 잘되면 임대료가 오를까
아래층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는다는
책방 주인의 말이
입구까지 고딕체로 따라나선다

빗장을 푼 골목은
숙련공처럼 휘거나 구부러진 청춘들을
알맞게 잘라내고 둥글게 말아
내일로 가는 숨을 고르고 있다

별똥이 밤하늘을 길게 건너가고
골목 귀퉁이에서는 까마중이 꽃을 피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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