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상실의 피그말리온 - 김희준

마루안 2021. 1. 30. 21:23

 

 

상실의 피그말리온 - 김희준


붓값이 없어서 그랬어

반지하는 오후의 결이 불온한 곳이었다 햇살의 단면이 울퉁불퉁한 곳에서 머리를 자르다가 스스스 소리에 엄마가 달려왔다 머리칼을 훔치자 어정쩡한 울음이 터졌다 갈라진 벽으로 햇살이 스며 들었다

얼굴은 마지막에 그리는 거야

새로 온 모델은 내가 좀 아는 여자였다 가운을 벗는 모양이 익숙했다 완만한 굴곡과 채도 높은 육체가 보였다 입술이 간지러웠다 토르소의 빈 젖을 빨다가 들켰던 미술 시간보다 더딘 벌을 받는 중이었다 그맘때쯤 여선생은 자주 엎드려줬다 흉상이 부서지는 상상을 하다가 붓을 놓쳤다 소리에 놀란 건 움츠러든 가운이 먼저였다

다시 들어가게 해 줘 엄마

형광등에 어깨가 녹았다 석고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피사체가 조명 앞에서 흘러내렸다 어디선가 유화냄새가 났다 묽은 살결은 농도가 진했다 캔버스에 담지 못한 허벅지와 근원을 빠르게 스케치하는 중에 저 누드모델 너랑 닮았어, 옆에서 키득거렸다

넌 어디 가서 많이 맞을 상이야

내가 좀 아는 여자는 찢어지는 중이었다 수십 개의 동공과 날카로운 붓이 섬세했다 봉투를 쥐고 가버린 내가 좀 아는 여자가 담배와 함께 태워졌다 그 아줌마 골반 그리다가 괜히 꼴리더라

배꼽을 그리면서 그 안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두꺼운 피부를 절개하던 순간 말이야

혈흔으로 흥건한 그림을 들고 나왔던 건 매끈한 석고상이었어 토르소 몇 점과 흉상을 던졌다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렸다 반지하에 팔다리 없는 햇살이 퍼지고 있었다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인디고 비행 - 김희준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크레파스를 사오셨다

다음날 학교에서 손등을 맞았다 도화지에 30장의 내가 크레파스를 든 채 울고 있었다

누구는 추상적으로 누구는 피상적으로 내 울음을 그렸다

오후가 사실적이었으나 내가 가진 색은 섞이지 못하는 고질병을 앓았다

나비와 아버지를 더 이상 그릴 수 없었다 그들은 평면적이었으므로

마당에 핀 수국이 파랗게 컸다 크레파스가 색을 담아내려다 부러졌다

아버지 손은 파랑이었다 안방에는 바닷물이 출렁였고,

물의 혈관이 만져졌다 질감이 거칠다가 따뜻하다가 구도 없는 그림이 역동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의 언어를 이해한 자가 살갗을 만질 수 있다는데 뜻을 잘못 해석하여 호된 물질을 당했다

이른 아침에 떠난 파도는 중력이 없다 눈치 없는 게가 옆으로 저미는 바람을 맞다가

기울게 세상을 읽어낸다 나비가 입체적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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