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라지는 모든 것은 가장자리로부터 - 최세라

마루안 2021. 2. 26. 21:49

 

 

사라지는 모든 것은 가장자리로부터 - 최세라


나의 뒤에서 내리는 눈은
부작용 같은 하루를 떠메고 날아가는 긴 긴 어지러움​

혀 밑에서 마이신 껍데기가 녹는다
잊은 꽃이 나타나기로 한 봄의 어귀까지 왔는데​

하루만 살고 말 것처럼​

사랑은 늘 어디까지 벗어 던질 수 있는가 묻기만 한다
부레를 삼키는 날들이다 물의 표면 어딘가 아슴푸레
불확실한 날들이다

물을 놓아주는 우수에
녹았던 것을 다시 얼리지 않아도 되는 우수에
홀씨를 가득 품은 흙들이 여기저기서 무너져 내린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가장자리로부터
어깨를 움츠리고 보고만 있다​

처음의 끝과 마지막의 시작들
차가운 얼음장 아래 살점이 허는 맥없는 물고기처럼
혀 밑에서 녹아 가는 온갖 약의 껍질들​

언제쯤 뱉을 수 있을까요
곧 나에게 처방되지 않은 싸락눈이 혀에 닿을 텐데요​

푸른 벨벳 드레스를 비집고 달아나는
아픈 등지느러미처럼​

손가락을 펼치면 우수의 눈이 스치며 떨며 사라져 간다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버리지 못한 날은 울지 못했다 - 최세라


비를 맞을 때면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순은의 점이 피부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아

따지 않은 사이다 병을 오래오래 흔들었다

그 무렵 나는 달빛공장에 다녔다
달빛을 원료로 바람과 안개를 만들었다
구름을 만들 때는
당신의 그늘을 얻기 위해 하루종일 뒤를 밟는 공정이 추가되었다

당신의 웃음을 원료로 달빛을 만드는 공정도 있었는데
그 공장은 먼 미래에만 있었다

로션을 바꿀 때가 됐어
병 속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빨리 사라지지

서랍을 열고 이미 지난 일을 끄집어낼 때마다
당신은 병 속으로 스며들곤 했다

자고 나면 별것도 아닌 어제들이 왜 베란다에 쌓이는지
묻는 날들이었다
식은 별이 손바닥에 넘쳐나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 날이면

춤을 피할 수 없는 밤이 시작되었다

 

 

 

 

# 최세라 시인은 1973년 서울 출생으로 2011년 <시와반시>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