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정처(定處) - 정일남

마루안 2021. 2. 21. 19:34

 

 

정처(定處) - 정일남


내가 없으면 나를 에워싼 만물은 의미가 없다
내가 있을 때 꽃은 피고 과일은 익어 굴러온다
나비는 날아와 어깨에 앉는다
나를 에워싸고 말을 걸어오던 부지기수들
나와 관계를 끊고 사계(四季) 밖으로 갈 것이다
미세물질은 허파를 갉아먹는다
몸의 반은 이미 흙으로 읽히고
두뇌의 반은 해골로 읽힌 지 오래
봉분에 바람꽃이 피어 손짓하게 되면
만 리 밖에서 무덤새는 날아와
꽃그늘에서 졸다 갈 것이다
마음속엔 동혈에서 흘러온 강물이
혼탁한 도시를 가로질러
간문(間門)을 흘러가게 될 것이다


*시집/ 밤에 우는 새/ 계간문예


 

 



무진 일기​ 1 - 정일남


문득 삼십 년 전으로 올라가 본다
민중시를 반 지하방에 엎드려 읽다가
어느 필화 사건에 휘말린 서정 시인이
아내가 떠나고 폐인이 되었다는 뉴스

홀로 깍두기 놓고 술에 빠져
깨진 사랑을 시로 토해냈다는 소문
저게 생의 실체구나
우주로 사라지는 과정이구나
88 하계올림픽이 절정에 이를 때
그는 수중으로 잠입하듯
변기 위에 쓰러져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

시인이 무화(無花)가 되는 것은
꽃이 지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생이여! 나는 용케 견디며
이렇게 밥을 먹는다




*시인의 말

시는 고향의 흙냄새다.
발효된 어머니의 간장 맛이다.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시를 썼다.
물소리 바람소리에 취해 살았다.
시로 위로받고 여기까지 왔다.
13번째 시집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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