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선인장, 마흔 근처 - 전인식

마루안 2021. 2. 22. 21:37

 

 

선인장, 마흔 근처 - 전인식


잠깐 졸았을 뿐인데 눈 떠보니 사막 한가운데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 길인지 희미하다
분명한 것은 머리맡에 놓인 서너 개의 보따리들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모래언덕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

무거운 짐 싣고 갈 낙타는 꿈속에 보았던 동물
밤하늘 별빛 해독할 점성술을 익혔으면 좋았을 텐데
잠시 쉬었다 갈 오아시스가 어느 쪽에 있는지
기러기 날아가는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알 수가 없다
바람이 등 떠미는 쪽으로 가면 행운이라도 따를까

어디로 가야 할지 물어볼 사람도 없다
엄마와 아버지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왜 미리 사막 건너가는 법을 물어보지 않았는지
여태 정신 팔고 다녔던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호수 하나 만들고도 남았을
흘렸던 눈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간절하게 그리운 눈물방울 하나하나
몸 안에 숨길 수 있는 선인장을 닮아야 할까
꽃도 버리고 잎도 버리고
온몸 가득 가시를 달아야 하는
사막, 마흔 근처

 

*시집/ 모란꽃 무늬 이불 속/ 한국문연

 

 

 

 

 

 

도화살 - 전인식


귀신처럼 예뻤다
눈을 가진 것들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입을 가진 것들은 몰려들어 노래 불러주었다
살아 있는 것들 모두
비스듬히 그녀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멀리서도 환했다
푸른 하늘은 거울이 되어주었고
해와 달도 일월오봉도 병풍 속인 듯하였다
바람이 알맞은 속도로 불어
살랑살랑 몸 흔들리기라도 하면
벽에다 주먹 쿵쿵 치는 일도, 고함지르는 일도
주로 이맘때 봄날의 일이었다
자주 배가 고팠고
물이 땡기던 일도 이 무렵이었다

비누 냄새가 스멀스멀 밤마다 스며들어
복숭아꽃 빛깔 여드름으로 돋아날 때
낮밤 구분없이 달려가고 싶던 그 골목길 끝에
꽃나무 한그루 서 있었다
봄날을 희롱하듯

삼가라는 말, 멀리하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양귀비였다가 베아트리체였다가
시시때때로 몸 바꿔가며
사람으로 분장하며 찾아들 때마다
아랫도리에 자꾸 손이 가던
누군가 간절히 그립던 한 시절


 

 

# 전인식 시인은 경북 경주 출생으로 동국대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7년 대구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및 1998년 <불교문예>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검은 해를 보았네』, 『모란꽃 무늬 이불 속』이 있다. 선사문학상, 통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