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잔설(殘雪)처럼 - 김재룡

마루안 2021. 2. 22. 21:50

 

 

잔설(殘雪)처럼 - 김재룡

 

 

끝 종소리와 함께 힘차게 날아오르며 세단뛰기를 하던 아이들이 신발 속으로 들어간 모래를 털고 교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철봉에 매달려 거꾸로 오르던 아이들도 현관 입구에서 신발을 털고 있었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몇몇 아이들이 바구니에 공을 주워 담고 있었다. 차디찬 한 올의 모래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아이가 두고 간 초록색 체육복 윗도리가 축구 골대 위에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오늘 장사도 이렇게 끝났군. 뒤따라온 한기가 어깨를 짚었다. 성긴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온 세상 눈부시던 한 시대가 그렇게 갔다.

 

키 큰 나무들이 들어찬 숲이거나

논두렁 밭두렁으로 이어진 들판이거나

흐린 시선 맞닿은 아무데서나

몇 조각의 외로움들 뒹굴고 있다

 

언제나 열외에서 서성이던 사내

오늘도 그렇게 동떨어져 있다

그 자리에 서서 녹아들겠다

가장자리부터 짓무르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겠다

 

이제

그대를 향한 그리움은 필사적이다

 

 

*시집/ 개망초 연대기/ 달아실

 

 

 

 

 

 

살림 그리고 일상 - 김재룡

 

 

오랜만에 단둘이 마주 앉은 어머니

그동안 참고 계시던 노여운 말씀

어떻게 살림을 그렇게 할 수 있니

 

아버님 돌아가시고 개인 병원 잡일을 하시며

막내와 셋방을 벗어나지 못하시는데

결혼 후 십 년이 다 되도록

생활비 한번 변변히 쥐어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에만이 아니라 생각해 보면

맏아들이 되어 홀로되신 어머니 모시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알뜰살뜰하달 수 없는 살림이기에

할 말을 잃고 고개 떨구지만

 

그렇게 어쩌다 어머니라도 오시면 우리 식구들

아내와 큰놈 작은놈 옹기종기

삼겹살을 굽는다

맑은 술 한 병 받아다 놓고

꽃소금에 들기름을 채운 종지와

마늘과 풋고추를 다북이 썰어 담은 접시

맛깔스레 참기름과 고춧가루로 버무린 파 무침

어머니가 가져다 놓으신 막장을 듬뿍 발라

이것저것 거성을 얹어 한입 가득 상추쌈을 한다

 

둘째 놈이 밥상 주위를 맴돌다

지지레 친다는 호통에 주저앉아서도

애비에게 술 한 잔 못 따라 안달을 하고

열 손가락을 다 사용해 밀어 넣고 욱여넣어도

막장으로 범벅된 밥알도 비계도 자꾸만 불거져 나온다

애들에게 아빠 입 크다고 놀려대는 아내의 짓궂은

놀림도 아이들의 밥상머리 장난도

노릿하게 삼겹살을 구워댈 때면

한 잔 술의 식탁과 함께 용서되지만

기어이 욱여넣었어도

기어코 불거지고 빠져나오는 것들은

 

끝내 채워지지 않는 부끄러움의 속살 같은

내 일상인지 내 살림인지

우리들 산다는 것의

서글픈 꿈인지

값싼 노동으로는 채울 수 없는

내 삶인지

 

 

 

 

# 김재룡 시인은 1957년 경기 양주 출생으로 강원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를 졸업했다. 19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면목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시흥고, 구로고, 개포고에서 근무했다. 1989년 전교조 결성부터 현재까지 조합원으로 있다. 2004년 강원도로 전보해서 속초상고, 강원체고, 춘천여고, 평원중, 화천정보산업고에서 근무했다. 2019년 8월 화천고등학교에서 정년을 맞았다. <개망초 연대기>가 생애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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