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간헐한 사랑 - 안상학

마루안 2021. 2. 26. 21:57

 

 

간헐한 사랑 - 안상학


심장이 그러하듯이
일정한 시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 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지요

퐁,퐁 솟는 샘이 그러하듯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간헐한 법이지요

꽃이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듯이
좀 길기는 하지만 우리 사랑도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는 것이 아닐는지요
...전생과 이생과 내생... 한 번씩 말이지요

해가 간헐적으로 뜨고 지듯이
달이 간헐적으로 차고 이우듯이
사랑도 간헐적으로 틈틈이 사이사이
쉬었다 이었다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영원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간헐한 것이 아닐는지요

나는 요즘 언제 있었나 싶은 내 사랑이 간헐하게 이우는 소리는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사람

 

 

 

 

 

 

북녘 거처 - 안상학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시를 처음 끼적여 본 공책이 놓여 있던
내가 살아 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典型)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 준 라면 한 끼 훌쩍이던 식탁
누이동생이 그토록 다니고 싶어 한 학교를 자퇴한 소년
상계동 종점 창이 없는 그 집 열일곱 한 달
그 어느 하루로라도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지하철 4호선 종점 당고개역 솟은 그 너머
아배 편지 한 장 받아들고 눈물 찍으며 돌아섰던
이제는 의지가지없는 그 곳
불알친구는 십 년 뒤 낙향하여 낙동강에 목숨을 흘려보냈고
편지 한 장으로 나를 불러내렸던 아배도 오래전 소식 없고
누이동생도 다른 하늘을 이고 산 지 오래
열일곱 소년만 꼬박꼬박 혼자서만 나이 먹어 가며
이 낡은 남녘에서
다 늦어 또다시 가출을 감행할 꿈을 꾸며
그 북녘을 떠올려 봅니다만, 진작부터 야외전축도 없고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 레코드판도 없어진 지 오랩니다만,
갈 수만 있다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동안 써 왔던 시들을 하나하나 지워 가며
내 삶의 가장 먼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
당신은 인생길 어디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없습니까
있다면 남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남녘입니까
미안한 일인지 어떤지 나는 아직 그 북녘입니다만,
당신, 당신들은 지금 어느 녘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