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뒷면 - 정현우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뒤돌아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
함께 뱉어내자고 말했는데
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
참외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서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컬러풀 - 정현우
옥상 문을 걸어 잠그고 밥을 먹었다.
멸치의 눈이 친구의 눈빛 같았다.
땅거미가 사람들을 갉아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투명한 가윗날 소리,
노을 속 색종이들이 살랑였다.
잔상이 길게 남으면 명암이 튀어올라
실눈을 지그시 떴다.
맞은편, 미술실 토르소는 하얗게 부서졌다.
한 조각 어둠이 내 등을 밀 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색이 궁금했다.
난간을 붙잡고,
발밑으로 대답이 없는 어둠,
깃이 부서진 새들이 몸속을 떠돌았다.
감정을 옮기는 빛들의 통로,
무언의 물감 속에 있었다.
색칠되지 않는 마음은 기쁨도 슬픔도 잴 수 없던
두 팔 안에 가둔 시간.
살아 있으려는 색은 무엇일까.
눈가에서 정물이 쓰러질 때,
변성기로 굽은 순간은
투명을 통과하는 검은 깃들,
마지막을 거는 새들의 첫 비행.
모두 섞으면 거대한 검은색 마침표가 도달하는지.
청동색 토르소가
회갈색 비늘을 떨어뜨린다.
나의 보호색은 나의 적(敵).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잔설(殘雪)처럼 - 김재룡 (0) | 2021.02.22 |
---|---|
선인장, 마흔 근처 - 전인식 (0) | 2021.02.22 |
정처(定處) - 정일남 (0) | 2021.02.21 |
낙타는 어제의 지도를 허물면서 간다 - 신표균 (0) | 2021.02.21 |
까다로운 방문객 - 김점용 (0) | 2021.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