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의 백 년 한 세기가 - 황동규

마루안 2021. 2. 27. 21:25

 

 

우리의 백 년 한 세기가 - 황동규


'우리의 백 년 한 세기가 다 지나가고 있네.
이제 엉덩이와 뒷다리만 남았어.'
낙상으로 누워 네가 말했지.
그런가?

하긴 우리 백 년의 엉덩이가 가파르긴 한 것 같아.
산책길을 반으로 줄였어도
몇 번인가 걸음 멈추고 숨 고르게 하거든.

내 전화 받아라. 산책 중이다.
내일부터 산책 다시 시작한다고?
아직 진달래 산수유 꾀꼬리는 없지만
네가 한때 입에 달고 산 노루귀는 소식도 없지만
흔친 않으나 노란 복수초들 얼굴 내밀고
공기의 맛이 전과 확연히 다르다.
네가 내일 너네 뒷동산에 오르면
너도 모르게 전과 다른 숨을 쉬고 있을 거다.
갈림길 만날 때마다 생각이 간질간질해지는 길을 걷다 보면
지난 한 세기의 엉덩이쯤 한번 걷어차보고 싶겠지.

뭐, 내 엉덩이라 생각하고 차겠다고?
거 좋지, 이왕이면
지난 백 년이 놀라 펄쩍 뛸 만큼 세차게,
단, 낙엽 밑에 숨어 기고 있는 나무뿌리와
알 듯 알 듯 한발 앞서가며 우는 산새 소리엔
발밑 조심하게나.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늦겨을 밤 편지 - 황동규


철새도 날지 않고 눈도 내리지 않는 겨울밤도
별들이 빛나면 견딜 만합니다.
강원도 산골이라면 물론 좋지만
서울도 근교만 벗어나도 괜찮지요.

보름달 둥싯 뜬 가을밤에 철새들이
조금씩 다른 알파형 그리며 나는 광경은
우주의 그림이지만,
겨울밤 하늘
초거성이 돼 사라진다는 오리온 별자리의 붉은 별과
나일강 범람 미리 알렸다는 시리우스별
그리고 북쪽 하늘의 붙박이 북극별,
이들이 만드는 거대한 세모꼴도 볼 만합니다.

달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오리온의 붉은 별이 이미 폭파되어 빛만 남아
지구의 현재로 오고 있는 과거의 별이라 해도 좋습니다.
우주가 변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변하는 꿈을 어떻게 꿉니까?
세모꼴 주변의 잊었던 별자리 하나를 찾던 중
못 보던 조그만 철새 무리 하나
엉성하게 알파를 그리며 그 자리에 들어옵니다.
새봄이 출몰하기 시작했군요.

 

 

 

# 황동규 시인은 1938년에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나 1946년에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했다.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겨울밤 0시 5분>, <꽃의 고요>, <사는 기쁨>, <연옥의 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