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외로운 이름들 - 여태천

마루안 2021. 3. 2. 21:45

 

 

외로운 이름들 - 여태천


전기를 읽을 때마다 궁금했어.

거미줄 같은 손금 촘촘한 무늬를 따라가면
마지막 이별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생일날의 기분이라도
하루 일과를 끝내는 순서라도

떨어지는 별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늦도록 노래를 불렀겠지.
다시 어제의 일을 빼곡히 쓰게 한다면
뭐라고 적을까.

전기를 펼치면 모든 글자들은 바둑의 돌처럼 가지런하지.

한 사람의 일생이란 원래 사후적으로 완성되는 것.
그도 모르는 일들이 그의 전기가 되고
바람을 안고 비와 나눴던 시간은 온데간데없는

전기를 빨리 읽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해서
서툰 글씨로 이름을 수차례 적어 보지.
그래도 서운해서 쓸쓸한 이름을
나직이 불러 보지.
그러면 가로수의 잎처럼 가지런하게
생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아.

같은 곳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같은 시간에 떠나는 것으로
위로가 되는 이름들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음사

 

 

 

 

 


저기 너머로 - 여태천


바람을 쥐는 법
수련은 언제나 몸 밖이거나
몸 너머의 세계에 있다.

셔틀콕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날아가고
아줌마로 보이는 너댓 명이 바람처럼 길을 내고 있었다.

수사(修士)가 된 듯
발걸음을 천천히 옮길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무엇인가 애절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눈이 왔던가?
여러 명의 아이들이 눈앞을 지나
저 너머로 건너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 시간을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여기서 빠져나가면
남겨진 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누군가 등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시인의 말

날씨에 대한 생각을 하자
구름이 하나둘 떠오르고
공기가 축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가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