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이 그런 거라면 - 권지영

마루안 2021. 3. 1. 19:40

 


사랑이 그런 거라면 - 권지영


날이 선 당신의 말들은
내가 떠나기를 바라는 건가요
술에 취한 당신의 손은
내가 떠날까 두려운 건가요

사랑이 그런 거라면
나는 얼마나 더 모른 체
견뎌내야 하나요

서로에게 하는 말들이
깨진 거울이 되고도
어디까지 당신을 바라보고
어디까지 나를 내보내야 하나요

사랑이 그런 거라면
나는 얼마나 더
바보가 되어야 하나요

먼 데서 내려오는 눈송이들이
창밖으로 내민 손 위에서
쉬 사라져가네요
어쩌지 못하고 가는 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얼마나 더 사라져야 하나요

사랑이 그런 거라면
우리는 얼마나 더
고독해져야 하나요


*시집/ 아름다워서 슬픈 말들/ 달아실



 

 

 

이별의 방정식 - 권지영


그와의 세계에서 안녕이라 했다
행복하세요
하나의 인연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언 같은 말
대답은 서성이다 흘렀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오래 서성였으므로
이제 하나의 우주와 작별해야 할 시간
김 서린 차창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함께한 기억을 지워간다

죽음을 앞두고는
행복하라 말하지 마세요

가슴으로 파고든 하나의 숨이
커다란 구멍이 된다
차라리 침묵하길
아무것도 빌어주지 말고
마지막이라는 인사도 없이 떠나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뜬금없이 흩날리는 눈발처럼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렇지 않게
쌀을 씻고 방바닥을 닦고
여린 눈을 훔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여름에도 발끝이 시렸다


 


# 권지영 시인은 울산 출생으로 경희대에서 국제한국언어문화과를 공부했다. 시집으로 <붉은 재즈가 퍼지는 시간>, <누군가 두고 간 슬픔>, <아름다워서 슬픈 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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