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무도 떠나지 않는 길 - 김윤배

마루안 2021. 2. 28. 19:55

 

 

아무도 떠나지 않는 길 - 김윤배


화사한 마음들은 어디론지 떠난다

길이 안개 속으로 휘고 상처 입은 사람들 마음이 철길에 물든다
떠나는 날의 슬픔보다 돌아오는 날의 통곡이 하산 길을 흐려놓을 걸 알아
아주 먼 여행 중인 혼령들, 몸에서 몸으로 하는 여행을 꿈꾼다

세상의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시작되는 여행은
몸에서 몸으로 가는 여정이었고

몸은 지옥이었던 생의 의미를 놓고 숙려를 연장하지 않는다

사흘, 숙려기간은 지났다 숙려 장소는 냉동실이었다

십 년째 숙려 중인 젊은이는 사흘의 숙려가 부럽다

사흘 동안에도 꽃이 피고 철새가 돌아오고 아이가 태어나고
노동자가 벨트에 끼어 죽고 고공시위가 계속되고 사막은
어느 곳에서나 시작된다

함께 가기로 한 고비였다

사막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 초원을 달려나가는 여인, 양의 뜨거운 피를 마시는 집시들, 낙타의 머리뼈를 타고 넘는 사막뱀은 파탄의 징후였거나 사후의 세계였거나

그것들을 그려 넣을 목관의 공간은 비어 있다

아무도 떠나지 않는 길에서는 바람도 떠나지 않는다


*시집/ 언약, 아름다웠다/ 현대시학사

 

 

 

 

 


내 영혼이 두려워진다 - 김윤배


붉은 땅을 걷는다, 몽유의 덫이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아스라이 밀려오는 붉은 빛이다
하늘을 맴도는 흰머리독수리는 숫자가 늘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독수리의 거대한 날개가 내 그림자를 덮치기도 한다
나는 놀라 돌무더기 위에 엎드린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간 자들이 있다

그들은 저쪽에 닿았을 거다
저쪽은 신탁의 땅이거나 불의 바다일지 모른다
그렇게 사라지는 거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자들은
선채로 시계추처럼 몸을 흔들거나 주문을 외운다

말의 흰 갈비뼈 사이에 사막여우 한 마리가 몸을 낮춘다
잠깐 사이 사막여우는 세 마리가 되고 다섯 마리가 된다

내 영혼이 두려워진다

영혼은 멀리 나갔다 잠든 사이에 지쳐 돌아온다
돌아온 영혼에서 오래된 책 냄새가 난다

종루에 오르는 아이가 보인다
아이는 붉게 다가오는 모래바람을 향해 가슴을 연다
아이는, 이 세상이 오래된 포도주 색깔과 오래된 책 냄새라고 생각한다

황무한 길은 일몰의 붉은 가슴으로 든다

나는 붉은 사막에 엎드려 통곡한다



 


*시인의 말

삶은 환상이거나 마법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이 그런 거라면 - 권지영  (0) 2021.03.01
상흔 - 이철경  (0) 2021.03.01
가벼운 하루 - 김영희  (0) 2021.02.28
만원 때문에 옆눈을 가지는 - 김대호  (0) 2021.02.28
이젠 잊기로 해요 - 백인덕  (0) 2021.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