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상흔 - 이철경

마루안 2021. 3. 1. 19:33

 

 

상흔 - 이철경


오래전 몽둥이로 서너 시간 넘게
죽음의 문턱까지 폭력에 노출된 적이 있다
높다란 미루나무가 픽픽 쓰러지고
자갈이 바위로 변하며 몸이 개미만 해지던 순간,
K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강물로 뛰어들다
가라앉던 기억이 있다
실신한 채 물가로 끌려나와 한참을 방치됐다
머리는 여러 곳 터져서 피가 낭자하고
뙤약볕에 달궈진 자갈밭에 흘러나온 피가 말라 가던 시간
누군가 신고로 강 건너 경찰이 오고 왁자지껄한 순간
깨어났다 다시 정신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강가에서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한 폭력에
팔이 부러지고 뇌진탕에 피를 많이 흘려
사흘 밤낮을 토하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지구가 빙빙 돌다 잠이 들면 멈추던
그때, 겨우 살아나 훗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원생 출신 외부인 K는 삼청교육대 끌려갔다
정신이상자 되어 퇴소 후 끝내,
한겨울 소도시에서 동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폭력에 가담한 또 다른 원생 출신 J는
폐결핵 요양으로 한여름 내내 강변에 움막 짓고
지나가는 개를 잡아먹다, 칼바람 부는 겨울날
마른 동태 되어 얼어 죽었다
내 나이 어릴 적, K는 폐병쟁이 J를 낫게 하려고
움막 속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으려 했는지
그때 머리에 난 상처처럼
기억 속 상흔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시집/ 한정판 인생/ 실천문학사

 

 

 

 

 


시인(是認) - 이철경


세상을 구하려는 돈키호테처럼
너무 맑던지 추하던지,
양면성을 지닌 슬픈 존재의 시인
권력 지향적이며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나약한 존재
평생 미열 같은 정신병을 앓는 사회부적응 집단
세상에 분개하다 어느 날 변절한 애인처럼
사상의 돌변도
시인에겐 종종 발생한다
캄캄한 바다를 항해하는 철없는 이상주의자

한때의 열정도 상심의 길로 접어들면
고립무원 세상을 등지고
아무도 모르게 홀연히 길을 떠나네
진정한 시인은 풍요와 거리가 먼
사막을 횡단하는 고행의 수도자 걸음
회오리가 은빛 모랫길 지우고
시인마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기도,

나도 어느 날엔가 사라질 것이네


 


# 이철경 시인은 1966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강원도 화천에서 성장했다. 서울과학기술대 전자공학과,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1년 계간 <발견>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목포문학상 평론 본상과 2012년 <포엠포엠> 평론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 <죽은 사회의 시인들>, <한정판 인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