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자목련 - 강민영

자목련 - 강민영 비에 젖은 목련 이파리 하나 주웠다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검게 멍이 든다 어머니 손등 저승꽃이 자목련 위에 피어난다 큰오빠 입에서 동그랗게 피워 올린 뜬구름 같은 도넛을 먹고 어머니는 마당에 각혈했다 젖은 솜이불을 이고 있는 듯 주저앉을 것 같은 나무는 멍든 사연을 수북하게 내려놓고도 머리가 무겁다 빗방울이 두드릴 때마다 위태로이 흔들리는 나무는 수십 년 동안 이별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홀로 깨어 뒤척이는 버리고 버릴 때마다 나무는 바람이 없어도 흔들리고 어머니는 혼자 떨어진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화전(花煎) - 강민영 진달래 화전 부쳐주던 어머니 빈 마대 자루가 되었다 우물이 깊어지는 봄 녹슨 대문 안에 잡풀들 무성하다 이불 속 노파를 간병인이 닦..

한줄 詩 2021.04.06

애도의 이유 - 백인덕

애도의 이유 - 백인덕 안경을 닦으며 걷는다 맹목의 순간이 느리게 이어지다 간혹 뚜렷해지는 사물들, 붉게 우는 우체통을 지나면 마주칠 때마다 건빵을 건네주는 선지자가 있다 길에는 늘 구원이 있고 제멋대로 흐르는 죽음도 있고 그러나 길은 어디로도 닿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가슴 높이 부지런히 양손을 움직여 안경을 닦는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을 너무 많이 본 안 봐도 되는 것을 열심히 본 마땅히 봤어야 할 것을 안 본 나와 시대와 세계와 우주 아이가 흘린 과자를 쥐고 순식간에 나무 위로 올라가는 다람쥐 제 그림자에 환한 모자 하나 씌워주지 못한 불기(不起)의 게으름이 오돌오돌 발밑에서 솟아오르는 여기-지금 불멸(不滅)이라니, 아무 겨냥도 없는 종소리 살 틈을 파고든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한줄 詩 2021.04.06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었다 - 김태완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었다 - 김태완 오래 전 읽었던 책의 접힌 부분을 편다 발효된 향기로 다가오는 눅눅한 시간 곱게 접었던 자리를 펴자 우수수 쏟아지는 그리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접어두었던 걸까 늘 소리내어 읽지 않았다 묵음으로 낭독되어 쌓여진 의미들이 내 몸으로 들어와 늘 접혀진다 너를 읽는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어느 줄거리에서 끊어진 맥락이 울고 있거나 편안한 저녁은 며칠이 지나 찾아왔다. 너의 쓸쓸한 문장이 나를 찾을까 오래 전 다짐한 약속처럼 눈물 머금은 너를 다독이며 한 장의 아픔을 넘긴다 접힌 흔적이 묵음의 무게에 천천히 소멸될 즈음 비로소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 되었다. *시집/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북인 싱겁다 - 김태완 예상했던 대로 가는 건 싱겁다 끝이 생각했던 대로 끝이 되는..

한줄 詩 2021.04.06

화들짝, 봄 - 김정수

화들짝, 봄 - 김정수 노총각 동생이 집을 나간 후부터 서울역 지하도 지나다닐 때마다 흘깃, 등 돌리는 얼굴들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느닷없이 검은 손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코 틀어막은 손가락 두 개 길을 종종댔다 가출한 동정은 따스한 눈으로 건너와 두 손에 건네지는 차가운 금속성, 혹은 쨍그랑 앞뒤로 젖혀지는 하루의 질책 외따로 떨어져 잠든 종이박스 왈칵 들춰보고 싶은 충동에 등 푸른 계단 아래로 굽고 마지막 통화와 함께 사라진 욕설 화석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서울을 떠날 때마다 뒤 돌아보는, 세 살 터울 같은 습관 네모난 풍경에 갇히고 계절마다 찾아오는 잦은 외출이 해감 될 즈음 면역력 약한 삶 하나가 환절기를 넘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오랜 세월 귀에 머물던 절벽의 야유에서 이명의..

한줄 詩 2021.04.03

배추밭 - 황형철

배추밭 - 황형철 하루가 다르게 배춧잎이 쑥쑥 자라는 것은 하늘에 가 닿으려는 배추벌레가 열심히 배밀이하며 길 내기 때문이지 널찍한 배추밭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은 잠자리에 든 배추벌레가 떼 지어 하늘을 나는 꿈꾸기 때문이지 나비 날개가 둥글디둥근 것은 이파리 갉아먹으며 숭숭 구멍 내던 어릴 적을 필시 기억하기 때문이지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4월 동백 - 황형철 -섬3 청명을 앞뒀는데 이름도 무색하게 동백이 한창이다 큰넓궤에도 피고 너븐숭이에도 피고 빌레못굴에도 피고 섯알오름에도 피고 송령이골에도 피었다 바람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 파도 덮쳐도 꺼지지 않게 애지중지 겹겹으로 불씨 에워싸 금방이라도 타오르겠다는 듯 환하지만 삼촌이 건넨 식은 지슬 같아서 어멍이 잡아준 마지막 손길 같아서 누군가 ..

한줄 詩 2021.04.03

먼지의 무게 - 이산하

먼지의 무게 - 이산하 ​ 복사꽃 지는 어느 봄날 강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밥을 지었다. 쌀이 익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저녁노을 아래 밥이 뜸 들어갈 무렵 강 건너 논으로 물이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네팔의 한 화장터가 떠올랐다. '퍽!' '퍽!' 여기저기 불길 속으로 머리들이 터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뇌수를 개들이 핥아먹었고 아이들은 붉은 잿더미를 파헤쳐 금붙이를 찾았다. 인간이 재로 바뀌는 건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가난한 집의 시신들은 장작 살 돈이 부족해 절반만 태운 채 강물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들은 언제나 머리를 가장 먼저 불태운 다음 마지막으로 두 발을 태웠다. 나는 한동안 생각을 지탱한 머리와 세상을 지탱한 발을 비교하며 삶의 무게를 저울질하다 재처럼 풀썩이고 말았다. 인간이 ..

한줄 詩 2021.04.03

기간의 경계에서 - 조하은

기간의 경계에서 - 조하은 가장 뾰족한 시간을 넘었다 생각했는데 시간은 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무처럼 몸에 새기는 것이었는지도 새순이 올라올 때의 그 간지러운 설렘이 몸을 적실 때에도 엇나간 박자가 삶을 두들겨댈 때에도 당신과의 추억은 나를 숨 쉬게 하는 마술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시간과 가장 빠른 시간이 만나는 지점에 오늘은 서 있다 어쩌면 세상은 두 눈 감을 때 품고 갈 마지막 이름과 지우고 싶은 시간 속에 있는 사람 사이의 전쟁 천사의 날개와 반월도를 들고 시간의 신을 베고 싶은 오늘 시간의 속도는 가차 없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비문증 - 조하은 눈에 파리가 날아다녀요 작은 날파리부터 온갖 날개 달린 것들이 날아다닐 겁니다 의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딱히 약은 없습니다 너무 많이..

한줄 詩 2021.04.02

그믐달 - 심명수

그믐달 - 심명수 뚜껑은 열리고 밤은 아직 발효 중이다 밤의 항아리 속이 구리다고 속단하지 말자 지문을 찍어본 사람이면 알리라 판이하게 드러나는 음과 양 나는 그 음과 양의 어두운 항아리 속에 가라앉아 있다 한 여자가 침몰된 나를 한 바가지 떠간다 먹먹하다 날숨에서 피어나는 별들 별은 항아리 속 숨구멍 나는 무엇인가에 자꾸 익숙해지는 걸까 다시 한 여자 얼굴이 떴다 여자는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오곤 한다 지상에서 아직도 여자는 그 구간을 흐른다 여자여, 그만 뚜껑을 닫아주오 아, 나는 항아리 속에서 발효 중이다 피안을 위한 침잠 밤은 이제 뚜껑을 닫고 밤물결 따라 노를 젓는다 *시집/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상상인 그 노총각이 쓸쓸하다 - 심명수 난로 위 주전자, 주전자가 열이 바짝 올라 있다 꼭지 달..

한줄 詩 2021.04.02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 이원하

가만히 있다보니 순해져만 가네요 - 이원하 몸을 녹이기 위해 창문을 닫으니 잘살아 보라는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속을 드러냅니다 나는 가뿐해진 몸으로 개 대신 기르는 신경초를 건드립니다 건드리니 신경초의 어깨가 움츠러듭니다 내 손이 아직 차가운가봅니다 몸을 제대로 녹이기엔 난방이 좋지만 가스통은 회색이라 아껴야 합니다 속을 알 수 없으니 일단 아껴야 합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게 사람을 닮았습니다 닮았다니까 좋은가요? 움직이는 신경초가 얼마나 예민하게요 대답해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눈이 내려도 밖으로 나와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무너지듯 주저앉아 울 수 있는 의자를 하나 살까요 사람 때문에 무너져본 적 없는 잘 살던 의자를요 아니다, 앞으로 자주 울지 않을 거니까 아무 의자나 살까요 고민이네요 자고 ..

한줄 詩 2021.04.02

섬진강이 궁금하다 - 이운진

섬진강이 궁금하다 - 이운진 섬진강에 가서 묻고 싶다 너의 하루는 어디까지인지 얼마나 긴지 너도 뒤돌아보면 멈추고 싶은 시절이 있는지 섬진강에 묻고 싶다 하늘에 닿지 못한 구름처럼 사랑에 닿지 못한 나처럼 너도 닿을 데가 없어서 흐르고만 있는 건지 먼 훗날 손목을 움켜 쥘 굽이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네가 지나온 시간의 간절함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왼쪽 손목을 누르는 통증과 낡은 책과 씹어 삼킨 밥알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물살이 출렁 기우는 동안 너의 하루도 먼지가 되는지 나만큼 통곡하는지 꽃 피고 꽃 지는 자명한 봄날 섬진강이 궁금하다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문학의전당 봄날 - 이운진 누군가 내 마음 터뜨려 간밤에 떨어져 내린 꽃잎처럼 가슴에 화르르 멍이 들면 봄길을 가다가도..

한줄 詩 2021.04.01